로마 시대에 지어진 원형 경기장은 현재까지 다섯 개 정도 남아있고 그중 하나는 튀니지 엘젬에 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찍었다는 엘젬 원형경기장은 다른 곳에 비해 보존이 잘 되어 있었고 규모도 3만 5천 명을 수용했을 만큼 컸다. 그 모습은 마치 로마시대 때 북아프리카가 누렸던 영화가 거짓말이 아니라고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엘젬 원형경기장에서는 관중석뿐 아니라 아레나와 지하 통로에도 들어가 볼 수 있었는데, 그건 정말 굉장한 경험이었다. 관중석에서 아레나를 내려보거나 아레나 한가운데서 관중석을 올려보았을 때의 기분은 완전히 달랐다. 아레나에 서서 눈을 감으면 영화에서 들어본 관중의 함성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압도되어 버렸다. 또 지하 통로와 작은 방들에서 바깥은 바라보는 기분은 굉장히 묘했다. 맹수들이 머물던 곳과 검투사들이 자기 순서를 기다리던 대기실, 죽음을 앞둔 기독교인들이 갇혀 있던 방들. 경기장으로 향하는 기다란 통로를 걸으며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원형경기장 가장 높은 곳에 오르면 엘젬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얗고 각진 건물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들이었다. 이곳에 더 머물다간 나도 저 건물들처럼 발이 땅에 심길 것만 같았고, 얼른 수스로 떠나기로 했다. 수스는 엘젬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휴양 도시다.
수스와 엘젬에 오기 전 튀니스를 여행할 때 세계 최대 규모의 모자이크 박물관인 바르도 박물관을 다녀온 적이 있다. 불과 몇 년 전에 바로 그 장소에서 테러가 있었고, 때문에 바르도 박물관의 분위기는 굉장히 삼엄했고 또 한산했었다. 그와 반대로 수스의 고고학 박물관은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어 정신이 없었는데, 그중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던 장소는 '메두사의 머리'라는 모자이크 앞이었다. 동글 넙적한 얼굴에 가느다란 뱀 여덟 마리가 달려있는 메두사의 표정은 뭐랄까, 많이 억울한 표정이랄까? 나는 속으로, '그래, 이전의 아름다운 모습을 저주에 의해 빼앗겼으니 억울할 만도 하지'라고 생각하며 그 앞에 조금 머물렀다.
수스 박물관 안에서 그나마 사람이 적은 곳은 기독교 관련 모자이크들을 모아둔 작은 방이었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되기 전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박해를 받았었다. 이에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지하 무덤인 카타콤으로 숨어들었는데, 이곳 수스에도 카타콤이 있다고 했다. 수스 박물관에 전시된 기독교 관련 모자이크 작품들은 아마도 근처 카타콤에서 가져온 것이겠다. 몇 개 안 되는 기독교 관련 작품들 중에서도 내 마음을 끈 것은 어깨에 양을 짊어지고 있는 목자 그림이었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깜깜한 카타콤, 그 어느 벽면에 망치와 정으로 새겨 놓았을 목자 그림이 아까 엘젬 원형경기장에서 본 지하의 작은 방들과 겹치자 마음이 먹먹해졌다.
박물관을 나오자 메디나의 뽀얀 성벽과 올리브 나무 위로 새하얀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올리브 나무는 녹색과 회색을 번갈아 내보이며 반짝였다. 그 반짝임을 뚫고 나는 지중해로 향했다. 휴양 도시 답지 않게 한산한 바다. 같이 바다를 바라보던 현지인들이 바르도 박물관에서 테러가 있던 해에 이곳에서도 39명이 목숨을 잃은 총기 난사 테러가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들과 같이 철썩대는 파도 앞에 쪼그려 앉아 이 오래된 도시들에서 이유없이 목숨을 잃은 이들이 더이상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