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계획은 다시 세울 수 있을 테니

by 권씀

9월에 세웠던 계획대로였다면 지금 즈음 강릉 바다 어딘가에서 배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야심 차게 세운 계획이란 건 틀어지기 마련이다. 병원 예약을 줄줄이 잡아두었고 다른 연차도 승진 면접에 필요한 준비 서류들을 챙길 겸 신청해 두었다. 어쨌건 알뜰히 아껴둔 연차를 시의적절하게 쓸 수 있으니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다.


가족들에겐 검사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걱정이 많은 분들이기에 나마저도 걱정에 보탬을 하기 싫단 생각이 들었고, 큰일 아니겠거니 하는 마음을 먹어서 다 마무리되고 결과가 나오면 말을 던져볼까 싶다. 미리 당겨하는 걱정은 온통 신경을 쓰게 만드는 거니까.




직업 특성상 여행 비슷한 일정을 많이 소화한다. 지금은 도내에 있는 문화유산(문화재의 변경어, 2022년부터 사용권장을 하였기에 여기에서도 문화유산이라 명명한다.)을 돌아보면 자연스레 곳곳에 숨은 절경들을 보곤 하는데, 때론 사람에 치이고 감정에 치인 마음을 추스르기에 제격이라 이만한 만족감이 또 있을까 싶다. 여하튼 중간에 내 전공이 아닌 다른 분야로 눈을 돌린 기간이 있었다. 대략 4~5년 정도. 드론, 3D프린팅 강의, 기타, 우쿨렐레 강습 등을 하다가 다시 길을 틀어 어린이 직업 체험 센터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그 기간에는 근무일이 들쭉날쭉이었고 사람들을 많이 접하다 보니 피곤함이 미친 듯이 몰려왔었다. 주말의 개념은 없었고 간혹 비번이 걸리면 그 전날 밤샘 이를 해서 행사 준비를 한 뒤 쉬었었다. 전공을 살려서 일을 할 수 없었던 시기였는데 쉬는 날이 되면 꼭 인근 문화유산을 찾아 여행을 가곤 했었다. 명승을 찾으러 가기도 하고 목조, 석조, 민속 문화유산에 대해 공부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다시 전공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26172012_1611253228954411_1885168940992205000_o.jpg

그즈음에 다시 굿판을 찾았고 알고 지낸 분께 부탁을 해 촬영을 했었다. (굿판에서 카메라를 들고 접근하면 주민들의 거부감도 있거니와 거센 항의를 받기도 하기에, 사전 조율이 필요할 때가 많다.) 연구 자료로 쓸 것도 있었지만 대개는 마음 둘 곳 없어 마냥 굿판을 보면서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었다. 무계획이 일상이던 시절이었다. 그때의 난 비일상적인 일상을 보내고 있었을지도. 진도, 목포, 신안 등 전라남도의 무형문화재들을 찾아가기도 했다. 어른들과 담소를 하다 보면 그게 기록이 되고 민속학 자료가 됐었다. 작은 촌락, 단체에서도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긴 역사가 있는지.


한동안 방황 겸 여행 겸 객원 연구원으로 일을 하면서 나름대로는 성과가 있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주최했던 [제1회 세계민속영상콘텐츠]에서 상을 받았고, 두 권의 민속지를 공동작업 결과물로 내놓게 됐다. 가끔 그때의 자료를 꺼내 보면 나름 재미도 있고, 바닷바람과 사람들의 목소리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 방황 덕에 다시 내 전공을 살려 일을 하고 있기도 하고.




올 연말에 세운 여행 계획은 싹 지워졌지만 그렇다고 낙담할 일은 아니다. 계획이란 건 바꾸면 되고 다시 세우면 되는 거니까. 그저 내가 지나온 시간들처럼 감정은 비워내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채워나가면 이 시기도 잘 지나가지 않을까 싶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매듭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