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많은 사람들이 덕담 반 농담 반으로 "좋은 소식 없어?"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
좋은 일들이야 너무나 많지만 아이를 묻는 질문이라는 걸 알기에 "아직 없어요."하고 대답하곤 했다.
결혼 전 인생 계획에 결혼도 자녀계획도 없던 나는 아이를 원하는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고 결혼을 했다. 그 결심도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 여기저기서 '좋은 소식'을 묻는다. 적지 않은 나이에 한 결혼이라 사실 나도 조급했다. 아니, 나보다는 남편이 40이 되기 전에 아빠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테스트기에 희미한 두줄이 핏빛으로 사라질 때도 어디에 말도 못 하고 혼자 삭히며 건강하게 다시 나에게 오라고 보내주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몸살기가 있거나 생리주기가 늦춰지면 테스트기를 해보았지만 늘 선명한 한 줄로 답했다. 그렇게 버린 테스트기만 백개는 될 것 같다. 결혼을 하고 1년쯤 지나니 혹시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결혼 전 남편과 한 가지 약속한 것이 있는데 '아이를 낳는 것은 자연스럽게 하자. 만약 아이가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면 인위적인 것은 하지 말자.'라고 서로 다짐을 받아둔 차였다. 인공수정과 시험관이 아이가 간절한 부부들에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알지만 그 과정의 고통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결혼하고 1년이 지나 2년 차로 접어들자 아이에 대한 압박은 더 거세졌다. 친정 엄마는 내 손을 붙들고 용하다는 한약방에서 보약을 지어 먹이겠다고 끌고 갔고, 시댁에 문안 전화를 드릴 때마다 "별일 없니?"라고 묻는 안부에도 혼자 흠칫흠칫 놀라는 수준이 되었다. 친정 엄마에게는 투정이라도 마음껏 부릴 수 있었지만, 시댁에는 또 그렇지 못했다. 작년에는 업무량도 너무 많았고 스트레스를 극도로 받고 있던 터라 엄마의 손주 타령에 그만 폭발해버렸다.
"나는 지금 나 하나도 감당하기 벅차. 나도 죽을 거 같은데 무슨 아이야! 나는 지금 나 하나 살리기도 힘에 부친다고. 내가 엄마 손주 낳아주려고 결혼한 게 아니잖아!"
엄마의 마음에 비수를 꽂을 말을 고르고 골라 내리꽂았다. 한동안 엄마도 충격을 받았는지 나에게 연락하지 못했고, 나도 씩씩거리며 엄마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나를 위한 말이라는 것을 왜 모를까. 하지만 아이를 가장 원하는 건 나라는 걸 엄마도 잊고 있는 듯했다. 내가 일부러 임신을 피하는 사람처럼 '왜 노력을 하지 않니? 그렇게 맥주를 마시니까 임신이 안되지? 너네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니?' 묻는 짜증 섞인 물음들에 매일매일 떨리는 마음으로 테스트기를 확인하고 혼자 고민하고 삭히던 날들이 억울하고 분하기까지 했다.
내 주변에는 난임이 아니더라도 자녀계획이 없는 부부도 있고, 자녀계획이 있지만 애를 써도 아이가 오지 않는 부부도 있다. 또 자녀계획에 맞춰 첫째며 둘째며 잘 낳는 부부도 많다. 그냥 그게 그 가족의 모습인데 각기 다르게 살아가는 게 당연한 거고 각자의 사정이 있을 텐데 왜 그렇게 아이 문제에 대해 묻는 게 자연스러운지 이상했다. 사실 가장 조심해야 하는 질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이야 한없이 가볍지만 대답하는 사람의 입장은 한 없이 무거울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간과하는 듯했다.
이리저리 상처 주고 상처 받고 만신창이가 되어서 결국 백기를 들고 난임센터에 스스로 전화를 걸었다. 생리가 시작되고 2~3일 사이에 방문하라고 했다. 그런데 쓰러질 것 같은 생리통에 결국 진료를 가지 못했다. 그냥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다. 어쩌면 정말 엄마의 말대로 내가 아이를 원하지 않아서 그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무의식에 아이가 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생겼다. 그리고 그냥 될 대로 되어버려라라는 마음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 아이가 내게로 왔다. 아주 흐린 두 줄로.
처음 놓쳐버린 아이가 있었기에 흐린 두 줄은 나 혼자 보며 삭혔다. 그런데 점점 진해져서 선명한 두줄이 되어을 무렵 출근하는 남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여보가 아빠가 된 거 같아."
"이거 지난번처럼 아니 지난번에 보다 진한 거 맞지?"
"그런 거 같아. 아직은 안정기는 아니지만."
"병원 가자."
"아직 병원 가도 아무것도 없어. 일주일쯤 더 지나고 가야 돼."
"나 믿을 수가 없어. 아 뭐지 얼떨떨해. 현실 같지 않아. 막 좋고 기쁠 줄 알았는데 잘 모르겠어."
"나도 그래."
둘 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남편에게 출근하라며 재촉해서 겨우 알 수 없는 감정들의 장을 벗어났다.
그렇게 일주일간 매일매일 테스트기의 분홍선이 더 진해지길 간절히 바라며 '자궁외 임신이라는 것도 있다던데, 또 지난번처럼 사라져 버리면 어쩌지' 하는 불안한 걱정들을 머리에 이고 지고 살며 시간을 보내고 병원을 찾았다. 동그랗고 1cm 남짓 아주 작은 아기집을 보았다. 그렇게 무사히 첫 진료를 보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다음날 아침 선홍빛 피가 비치기 시작했다. 또 갑자기 무서워졌다.
그리고 두려움에 다시 찾은 병원에서 그 사이 많이 자란 아기집과 난황 그리고 아주 작은 아이까지 보았다. 초기 출혈은 착상혈일 수도 있고, 또 유산 끼일 수도 있지만 초기에 유산은 워낙 흔하고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마음 편히 가지고 쉬라는 소리만 듣고 돌아왔다. 나는 회사에 연차를 내고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내내 누워있었다. 회사일도 회사일이지만 지금 이 아이한테는 나 밖에 없으니까. 내가 지키지 못하면 또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아서 그냥 아이만 생각하기로 했다. 아이를 위해 움직임 없이 내내 누워있으니 척추가 딱딱하게 굳는거 같고 목도 뻣뻣해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입덧도 없었는데 근손실이 와서 체중이 2kg 남짓 빠졌다. 그렇게 누워있었던 덕에 점점 출혈도 멈췄고 다시 출근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다. 그러자 지옥 같은 입덧이 시작되었다.
먹지 않을 수도 먹을 수도 없는 입덧이었다. 먹지 않으면 위액이 넘어와서 가슴팍이 화끈거렸고, 먹으면 체한 듯 머리까지 왕왕 울렸다. 집에 가만히 누워있으면 아파트 전 세대에서 해 먹는 모든 음식 냄새가 났다. 밥 냄새가 났다가 라면 냄새가 났다가 고기 냄새가 났다가 찌개 냄새가 났다가 창문을 닫고 환풍기를 틀어도 소용없었다. 어딘가의 틈새를 비집고 냄새가 날아들었다. 늘 덮고 자던 이불에서도 코를 찌르는 악취가 느껴지고, 늘 쓰던 핸드워시에서 향수로 손을 씻은 듯 역한 냄새가 올라왔다. 바닥이 울렁거리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물을 마셔도 시큼한 위액을 토했다. 평생 겪어보지 못한 고통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한편으로는 아이가 드디어 자리를 잡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