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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태욱 May 10. 2020

아빠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나는 어떤 아빠가 되고 싶은가

나는 어떤 가족을 만들고 싶고, 왜 그런가요?
— 비저너리 크루에세이 주제


이 질문에 나는 가장 먼저 우리 아빠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어떤 아빠가 되고 싶은지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내가 지켜본 아빠는 31년 동안 한 직장에서 정말 소처럼 일했다. 회사의 온갖 (은근한) 퇴직 압박에도 끝까지 버텨냈고, 평일 주말 없이 거의 회사에 헌신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 아빠는 내가 인정하는 존버의 끝판왕이다. 덕분에 나는 학자금 대출 0원으로 졸업을 했고, 아빠의 서울 발령 이후부터는 상경한 대학생이 혼자 살면서 겪을만한 크고 작은 경제적 어려움들도 대부분 피해 갈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번 돈을 오롯이 나에게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출 수 있었다. 신나게 즐기는 지금의 내 20대의 모습이 있을 수 있었던 건, 아빠의 덕이 꽤나 크다고도 볼 수 있다.


며칠 전 아빠가 명퇴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퇴직 후 아빠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큰 고민거리가 나에게 주어졌다. 이 고민거리가 나에게 들어온 이유는, 아빠가 아빠의 삶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아빠는 새벽같이 출근해서 밤늦게 돌아온다. 퇴근 후엔 새우깡에 맥주 한 캔으로 티비 앞에서 잠깐 시간을 보내다 잠에 든다. 그리고 그런 삶은 일주일 내내 평일-주말 없이 반복된다. 퇴근 후에 종종 아빠가 사 오는 맘모스 빵이나 우유, 바밤바/비비빅이나 요거트 같은 자잘한 물건들을 보면, 밤 11시경 아빠의 심정을 얼추 짐작해볼 수 있다. 나도 돈을 벌어보니 이제는 아빠의 마음이 조금씩 이해가 되더라. 부쩍 주말에 아빠가 외식을 제안하거나, 배달 음식을 시켜주는 빈도도 높아졌다. 주말 하루 종일 일을 마치고, 말없이 마트로 가서 한바탕 장을 봐오기도 한다. 이런 아빠의 모습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해내려는 마음에서 오는게 아닐까 싶다.



열심히 돈을 아끼고 아끼며 살았던 아빠가 요즘 부쩍 가족들에게 소비를 늘리고 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답답함과 미안함을 느낀다. 생각해보면 아빠가 무언가를 즐기면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본게 꽤나 오래전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좋은 것들이 많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감정을 아빠가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취미도 찾았으면 좋겠고, 온전히 아빠만의 삶의 영역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서 이번엔 유독, 얼마 남지 않은 아빠의 생일 선물이 고민된다. 크던 작던 아빠의 삶의 질을 높여줄 무언가를 선물하고 싶다. 매 주말마다 집에서 일을 하니까 일하기 좋은 바깥 공간을 소개해주거나, 집에서 일할 때 생산성을 높여줄 무언가를 선물하면 어떨까 싶다. 좋은 게 좋은 거란 걸 느꼈으면 좋겠고, 그걸 시작으로 아빠가 본인 스스로에게 더 많은 투자를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스스로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어떤 아빠가 되고 싶냐는 질문엔, 쉽지 않겠지만 내 삶을 지킬 수 있으면 좋겠다는 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아빠로서의 책임은 다하지만, 주도적으로 내 삶을 꾸려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식들도 함께 각자의 삶을 멋지게 만들어나갈 수 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내가 아빠가 된 후에 이 글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어린 시절 치기 어린 생각이라고 느낄까. 그래서 그때쯤이면 나는 어떤 주도적인 삶을 만들어가고 있을까. 궁금해지는 밤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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