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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매뉴얼과 어긋납니다

쉬어가는 브런치-구호활동의 신속성과 현장의 중요성

by 구르는 소

* 구호활동에 대한 글은 그만 쓰려고 했는데, 수도권의 기록적 폭우로 많은 이재민과 피해가 발생해 몇 자 적어봅니다.


한창 복지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중, 코로나 확진자가 몇 명 나왔습니다. 해당 가정이 저소득층이라 가용예산에서 마스크랑 상비약이라도 지원할까 하여 예산을 검토해봅니다. 책정된 프로그램 예산에서 행정비만 몇십만 원 남았습니다.


"행정비를 일부 돌려서 급히 확진 가정에 마스크 등을 지원합시다"라고 얘기했더니,

"상담키트는 관련사업이라 구매할수 있겠지만, 감염병예방키트는 연관이 없습니다. 또한 매뉴얼에 행정비는 행정비로만 100% 지출하라고 명시되어 있어서 불가합니다"라는 답변이 들려옵니다.


직원들과 논의하여 회계계정과목 변경 시 예산 10% 내에선 내부 품의 진행 후 무방하다는 매뉴얼 규정을 찾아냈습니다. 그런데 담당 직원이 급하게 자리를 비워 2~3일 후에나 내부 품의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격리된 지 이틀 됐는데, 3일 뒤면 거의 격리가 끝나갈 무렵입니다. 내부 승인받아 물품 견적서 받고 지출 승인받아 지출 및 구매 뒤 물품 포장해서 배송하면 이미 격리가 끝났을 것입니다.

다시 직원들과 논의 후, 예전에 사무실 내방자들을 위한 마스크와 자가 키트 등을 행정비에서 구매한 적이 있음을 찾았습니다. 대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판단 후, 행정비에서 구매하기로 하고 내부 근거자료를 만들어 놓자 하였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해주어야 할 말을 가감없이 한 덕에, 큰 문제없이 물품을 긴급 구매하여 지원하였습니다.



정부나 기업과 마찬가지로 시민사회조직에서도 매뉴얼이 중요합니다. 보통 직원들이 1~2백 명이 될 때까지는 간단한 내외부 규정과 상식적인 선에서 조직운영이 가능하겠지만, 3~4백 명을 넘어서부터는 각 경영분야 및 여러 사업별로 디테일한 내부규정과 매뉴얼이 필요하고 그것들이 법과 사회규칙에 위배되지 않는지 면밀한 검토가 필요해집니다.

4~5백 명의 직원들이 있다면, 완전히 매뉴얼 중심으로 조직과 사업운영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조직이 커지고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선진국가로 갈수록 매뉴얼이 운영의 중심이 되고 규범과 제도는 삶의 기본이 됩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상충되고 문제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 담당인력이 수시로 바뀌는 상황에서 매뉴얼은 조직과 사회를 유지시키는 큰 힘이 되지요.


다만, 매뉴얼에 너무 의존하거나 정해진 규범대로만 사고하고 행동해 버릇하면 돌발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지거나 창의성이 훼손당하기도 합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구호지원물자와 인력을 지원했습니다. 워낙에 일본이 재해대처 매뉴얼도 잘 되어 있고 선진국이라서 구호활동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다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회관에 구호물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인근 마을에서 굶어 죽은 노인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유를 파악해보니,

도로가 유실되거나 유실될 위험이 있는 곳에는 접근하면 안 된다.

구호인력의 안전이 담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호활동을 하면 안 된다.

유통기한이 임박하거나 기한이 지난 구호물자를 배분해서는 아니 된다.

등의 매뉴얼을 지키다 보니 한두 시간이면 갈 이재민들에게 접근을 하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구호물자들의 유통기한이 거의 다 돼서 물자지원도 불가하였다고 하네요.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관료화된 조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뉴스를 보다 보니, 기록적인 수도권 폭우를 겪은 지역의 수재민들에게 피해사실을 사진으로 촬영 해오라는 요구에 항의하는 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물이 들어왔는데 그거 사진 찍을 시간이 있어요?

아니. 집안에 물이 들어왔는데 사진 찍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있냐고."

2022년 8월 10일 KBS 9시 뉴스 갈무리

주무관청의 담당자도 밀려나는 업무에 힘이 든 상황입니다. 담당자는 매뉴얼대로 해야 하고 당연히 현장 사진이 첨부되어야 지원 신청을 진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일단 신청을 받고 추후 피해가정을 방문하여 사진을 찍거나 책임자가 먼저 피해가정을 방문하는 등의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구호활동은 긴급히 진행되어야 하고 현장의 피해자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담당자가 매뉴얼을 지키고 확인함과 동시에 중간급이나 현장의 리더급 책임자가 탄력적으로 상황판단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중앙의 최상부에서는 현장 책임자의 판단을 존중하고 믿어줘야 합니다.

그래야 빠른 구호와 지원이 가능할 것입니다.

완벽하진 않겠지만, 어려움에 처한 이재민들의 상처를 보듬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재난으로 사망이나 부상, 피해를 입으신 분들께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바라며, 빠른 지원과 다시 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수고하시는 모든 분들을 응원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국민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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