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간에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살면서 평생 행하는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뜻으로 한동대 법대 김두식 교수의 저서 '불편해도 괜찮아'에 나오면서 회자되는 말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평생 쓰고 죽어야 하는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어 누구는 어린 시절 지랄을 다 떨고 어떤 이는 성인이 되어서 그간 안 떨던 지랄을 떤다는 의미란다. 청소년기에 정말 지랄 맞게 양아치 짓을 하던 아이가 나중에 성인군자처럼 살고 있거나 엄친아로 자라온 아이가 4~50대에 온갖 추잡한 짓은 다하고 사는 걸 간혹 볼 수 있으니 꼭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비슷한 개념으로 난 '평생 공부/독서 총량의 법칙'을 자주 얘기하는데 사람들의 생각이 비슷한지, 검색엔진에서 동일한 문구를 찾을 수 있었다. 평생 독서해야 하는 총량이 정해져 있어서 어릴 때 독서량이 많은 사람은 성인기에 책을 잘 안 읽고 청소년기에 책과 담을 쌓았던 사람은 성인이 되어 책과 친해진다는 의미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어렸을 때 책을 많이 본 아이가 늙어선 노안으로 책을 많이 볼 수 없고 책과 담을 쌓고 자란 사람이 성인이 되어 육아와 회사적응 등을 위해 책을 읽는다는 상황도 생각해 본다면 이 문구도 맞는 말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나와 아내가 딱 '독서 총량의 법칙'에 맞는 경우다.
나는 어렸을 적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다. 시골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던 아버지 서재에 책이 가득했고 해 떨어진 시골에서 딱히 할 게 없던 시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당시 동년배들보다 독서량이나 독서의 질이 깊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요즘엔 경제 관련 주간지나 볼 뿐 눈과 손은 TV와 핸드폰에 머물고 있다. 10년 전 지금 집으로 이사 오면서 꿈에도 그리던 내방 서재를 만들어 수십 권 책을 집어넣었지만 이제 책은 다 사라지고 아이들 간식 쌓아 놓는 선반으로 이용되고 있다.
아내는 나와 반대의 경우다. 학창 시절 얼마큼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결혼하고 나서부터 아내는 육아와 바쁜 일 등으로 책을 많이 읽지는 못하였다. 육아할 때면 육아 관련 책을, 일을 위해 보육과 공동육아/놀이 관련 책들을 열심히 읽는 정도였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서 친구의 권유로 글쓰기 인문학 교실을 다니더니 아내가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약 5년 전부터 아내의 독서량은 엄청나다. 급기야 거실벽 쪽의 소파를 옆으로 치우고 책장을 설치하더니 거기에 책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늘어나는 책이 너무 많아서 '막 채우지 말고 일단 읽은 책들만 넣어'라고 했더니 '뭔 소리래. 다 읽은 책이거덩!'라고 얘기해서 깜짝 놀랐다.
어느 날 아내의 손에 데미안이 들려 있었다. 마을 방과 후 아이들과 토론을 해야 해서 어렸을 적 읽어본 책을 다시 읽어본다고 했다. '자기는 데미안 읽어봤니?'라고 아내가 묻기에 '데미안'은 청소년기에 읽는 책이야. 그 책은 중학생 때 읽었지'라고 우쭐댔다. '책 내용이 어렵구먼 이걸 중학생 때 읽고 이해는 했니?'라고 아내가 묻기에 다시 답했다. '이해가 중요한 게 아니야. 겉멋이지. 사춘기 소년의 감성!'라고 했더니 아내가 매우 어이없어했다.
한 번은 아내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읽고 있기에 '재미있지?'라고 물었더니 '이게 재미있다고? 이 책은 언제 읽었기에 재미있다고 기억하니?'라고 되묻는다. 내가 말했다. '재미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나 그 책 초등학교 6학년 때 읽어서 잘 기억이 안 나'라고 얼버무렸다. 아내의 눈빛은 '그래~ 너 잘났다! 이 남편놈아!!'의 황당함이었다. 아내도 데미안과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청소년기에 읽었다는데, 새로 산 책뿐만 아니라 과거에 읽은 책들도 다시 읽고 있고 있는 것이다.
눈과 머리가 '읽기'에 집중할 때, 다독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몸이 반응하면 몰입하면 된다. 닥치는 대로 어떤 책이든 읽고 싶을 때, 독서하다 보면 읽는 요령도 생기고 정보저장하는 사고체계도 형성된다. 다독하면서 나의 독서취향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 관심분야의 책들을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는 게 전문 독서꾼들의 길이라고 생각된다. 거실벽면 책장을 다 자기 책으로 채우고 있는 아내의 엄청난 독서량은 전문 독서꾼이 되어가는 과정일 것이다. 이미 아내의 독서량이 그동안 내가 읽은 책의 총량을 넘어 선 것 같기도 해서 이제 잘난 체를 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난 추억 속에 독서를 가둬놨는데 아내는 다시 독서를 하며 문학감수성을 현실에 내놓고 있다.
20여 년간 보육과 돌봄의 분야에서 경험과 지식을 쌓고 최근 몇 년간 엄청난 독서량을 보여온 아내가 올해 초 책을 출판한다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하는 동안 가끔씩 공동육아 관련 월간지등에 기고한 경험도 있었으니 글 쓰는데 어려움은 없었을 테지만 무언가 글을 써서 남 앞에 '책'으로 선보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같이 일한 동료 교사들끼리 경험담과 소감을 엮어 공동저자로 출간을 한다니 서로 비교됨에 더욱 쉽지 않았을 텐데, 기어이 글을 써냈고 드디어 책이 나온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나는 마을 방과 후 교사입니다'에 출연교사로 나와 영화배우(?) 데뷔까지 하더니 이제 출간작가로까지 데뷔하는 것이다. 공동저자라지만 뭐 어떠랴. 써 내려갈 글감이 있고 그 글감을 같이 고민해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소중한 것이다.
나는 날마다 아이들과 만나며 일상에서 그들의 삶이 그 자체로 빛이 날 수 있도록 질문하고 또 고민한다. 아이들이 배우는 사람으로서의 주체성을 발휘해 일상을 통해 배움이 일어나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 내가 하는 일은 그저 아이들 앞에서 무언가를 가르치는 일로만 채워지지 않는다. 일의 가치는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이 되고, 일에 대해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책 '아이들 나라의 어른들 세계' 중 아내의 글 일부)
일의 가치는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이 되고, 그 일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니...
이런 멋진 문구까지 글에 나온다. 어디서 인용한 문구가 아니고 본인이 직접 쓴 문구라고 한다.
나도 20년을 일했고 독서량도 많았으며 젊은 시절 영화제에서 자원봉사도 했고 브런치에서 글도 쓰는데, 아내는 진짜 영화제에 배우로 이름이 올랐고 실물 도서의 저자가 되었다. 아내와 나는 둘 다 사회복지사인데 나는 2007년에 행정안전부 장관상을 받았고 아내는 2021년에 여성가족부 장관상을 받았다. (이제 둘이 같이 보건복지부 장관 상만 받으면 된다) 앞섬이 나중 되고 나중이 앞서는 법이다. 사람일이라는 게 아무도 모른다. 앞선 아내의 길이 평탄하게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아내와 나 둘 다 노력은 같았는데, 둘의 결과가 사뭇 달라 이유를 잘 살펴봤더니 아내한테는 같이 고민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림자 노동이라고 치부되며 돌봄 노동자로서의 낮은 사회적 인식과 처우에도 불구하고 자기 확신과 열정을 앞세운 동료 교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교사들을 따르는 아이들이 있었다. 항상 해맑게 웃으며 순수한 마음으로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마을 방과 후의 아이들 말이다. 어떤 이해관계도 없이 무한긍정의 지지를 보내는 방과 후 아이들이야말로 지금껏 아내를 이끌어온 원동력이 아니겠는가!
또한 코로나 감염병 앞에서 새삼 이들의 작은 돌봄이 소중함을 알아보고 이를 책으로 알리자는 조합원들, 자기 특기를 살려 촬영카메라를 들이밀고 영화를 찍은 감독부부와 다방면으로 지지하는 마을 방과 후 관계자들이 있었다. 이들이 아내의 2022년 소중한 '동료'들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가치관도 다르고 생활방식도 다 다른 조합원 부모들이고 각자 관계에서 친함과 불편함도 있겠지만, 일단 상대방을 바라봐주고 귀 기울여준다는 것은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타인의 삶을 진실되게 바라봐주고 서로 격려해주는 것. 말은 쉽지만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기는 쉽지 않다. 모두 감사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