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시절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어떻게든 글을 좀 더 잘 쓰고 이야기를 잘 만드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었다. 단지 그것만 한다 해도 쉽지 않은 목표인데 생활고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병행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는 잠도 줄여 가면서 밥도 굶어 가면서 기어이 성취를 이루어 낸다고 하는데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도 쉽지 않은 일을 수면 부족에 피로한 몸으로 해내는 건 불가능했다. 분명 이 세상 누군가에게는 가능한 일이었을 테지만 어쨌든 나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는 달랐다. 당시에 일하던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에 하루 시간 대부분을 쏟아 넣고 있었으니 이쪽은 나날이 능숙해져 갔다. 손님이 몰리는 피크 타임의 계산대 운영, 새벽에 입고 되는 물류 검수, 폐기 식품 관리, 취객 응대, 유제품 발주, 식품 발주 등 점점 더 해낼 수 있는 영역이 넓어졌다. 사장님도 이렇게 성실하고 유능한 아르바이트생은 처음 봤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하지만 시급은 올려주시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신입 아르바이트생이 들어와 업무를 가르쳐주게 되었다. 평소 몸에 익었던 일이라 별생각 없이 하나하나 알려주었는데 일일이 나열하기 시작하니 그 양이 꽤 많았다. 신입분은 이렇게 시간대별로 타이트하게 정해진 일정을 다 외우면서 어떻게 다음날 인근 학교 소풍을 계산하여 식품 발주를 추가로 넣는 것까지 신경 쓸 수 있는 거냐며 깜짝 놀라 하셨다. 감탄은 아니었고 순수한 놀라움이었다.
그 순간 문득 내가 이 일을 상당히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능숙해지고 싶은 일은 이게 아닌데 어쩔 수 없이 시간을 쏟아 부어서 어쩔 수 없이 능숙해져 버렸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평소에는 아무 생각없이 척척 해내는 업무였는데 그것을 자각하고 나니 호흡이 무거워지고 두통과 구토감이 생겨 일하기가 힘들어졌다.
그것 때문에 그만둔 것은 아니었지만 얼마 뒤 나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조만간 또 돈이 떨어져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 또 원하지 않는 일에 능숙해져 버릴 거라는 사실이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내가 진정으로 능숙해지고 싶었던 일에는 거의 진척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더 마음이 힘들었다. 이 일이 트라우마로 남아 평생동안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힐 것만 같았다.
그로부터 십여년 뒤. 나는 운 좋게 꼭 하고 싶은 일 중 하나였던 게임 회사에 취업하게 되었다. 게임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제작 과정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던 나에게 있어서 게임 제작의 기본적인 도구인 게임 엔진을 다루는 일은 시작부터 너무나 큰 벽이었다. 프랍, 컬리젼, 터레인, 트리거, 테이블 등등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용어들과 영어로 된 수많은 메뉴 항목들을 보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도저히 이것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될 자신이 없었다.
그때 문득 편의점 아르바이트하던 시절의 일이 떠올랐다. 딱히 잘하고 싶지 않았던 일인데도 단지 시간을 많이 투자했다는 것만으로 능숙해져버렸던 그날의 상실감이 생각났다. 그러니 어쩌면 이 게임 엔진을 다루는 일도 시간만 많이 투자 한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이건 잘하고 싶지 않은 일도 아니고 몹시도 간절하게 능숙해지고 싶은 일이었다. 덕분에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겨서 도망가지 않고 시련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달 지나지 않아 게임 엔진을 다루는 일에 능숙해졌다. 게임 엔진은 툴(Tool)이고 툴은 단어 의미 그대로 도구였기 때문에 많이 사용할수록 점점 더 손에 익어갔다. 물론 내가 담당하는 업무에 관련된 일부 기능들에 대해서만 능숙해진 것이고 여전히 90% 이상의 영역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해낼 수 있었다.
어떤 새롭고 낯선 일이라도 절대 시간을 충분히 투자한다면 어느 수준 까지는 저절로 능숙해질 수 있다는 믿음은 지금도 새로운 업무나 환경에 적응할 때마다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그때는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을까 봐 걱정했던 경험이 지금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살다 보면 이렇게 과거의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당장 오늘 하루를 버텨내는 것조차 힘겨워 삶을 손에서 놓고 싶어질 때마다 그런 것을 발견했던 경험들을 되새기며 버텨내곤 한다. ’사람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라는 말을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누가 처음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명언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