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기말고사를 마친 후 시험기간 내내 관심을 주지 않아 마구잡이로 자란 머리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머리는 직모여서 주기적으로 파마를 하곤 하는데, 파마가 거의 풀린 상태였기에 시험이 끝나 시간도 여유롭겠다, 파마를 하러 미용실에 들렀다.
"찾으시는 디자이너 선생님 있으신가요?"
"아니요. 따로 없어요."
나는 기분이 내키는 대로 미용실을 가곤 해서 딱히 단골이라고 할 만한 곳이 없고, 당연히 전담 미용사도 없다. 늘 그렇듯 배정된 디자이너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았는데, 파마를 한다고 하니 커트를 살짝 하곤 나한테 물었다.
"혹시 머리에 롤 감는 것을 이 친구한테(옆에 서있던 실습생) 시켜봐도 될까요?"
비싼 곳, 저렴한 곳 여러 미용실을 다니며 파마를 해봤는데 지금까지 경험상 롤을 어떻게 마냐, 디자이너의 실력이 어떤가 가 머리에 큰 영향을 주는 것 같진 않았다. 단지 곱슬거리는 머리를 내가 어떻게 드라이하냐의 차이었다.
나는 흔쾌히 "네 그러세요."라고 대답했다.
거울로 눈이 마주친 실습생은 왠지 모르게 긴장한 모습이었다. 시작하겠다는 말과 함께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롤을 말면서 학생인지, 그렇다면 혹시 앞 학교에 다니는지, 시험 기간인지 여러 질문들을 했던 것 같다. 시험 기간 내내 잠을 줄여가며 공부했고 시험이 끝난 직후라 긴장이 풀린 탓인지 피곤함이 몰려와 비몽사몽 한 채로 대답을 했는데, 사실 어떤 대답을 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러고선 차라리 '내가 과정을 지켜보는 것보다 눈을 감는 게 편하시겠다'라며 멋대로 자기 합리화를 하고 나선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수리가 뜨거워 눈을 떠보니 어느새 머리에 열이 가해지고 있었다. 이내 적응하곤, 열의 따뜻함에 다시금 눈이 감겼다. 또 다시 시간이 흐른 후, 이번에는 목덜미가 차가워 눈을 떴다. 열처리가 끝나고, 분무기로 중화액을 뿌리는 듯싶었는데 아마도 뿌리면서 목덜미에 튄 것 같다. 느낌이 끈적해서 목덜미를 손으로 쓱 닦으니 그제야 알아차린 듯 당황하며 연신 죄송하다고 하셨다.
중화 시간이 끝나고, 머리를 감으러 이동했다.
"물 온도 괜찮으신가요?"
"네"
"아직 마사지가 서툰데 시원하신지 모르겠어요"
"네 괜찮습니다."
"더 헹구시고 싶은 곳 있으신가요?"
"아니요"
그렇게 파마를 모두 마치고 서둘러 방에 들어가 자야지라는 생각을 한 채로 결제를 하고 뒤돌아서는데, 실습생이 멋쩍은 얼굴로 서있었다. 내가 맡겨놓은 짐과 딸기맛 사탕 하나를 건네며
"아까 실수로 많이 불편하셨죠? 죄송합니다. 가시는 길에 달달한 사탕 드시면서 기분 좋게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그렇게 사탕 하나를 받아 들고 나오며 생각해 보니, 아마도 피곤한 탓에 대답을 계속 짧게 하고, 표정도 계속 무표정이어서 혹시 본인 실수로 기분이 많이 언짢았나 보다 생각하셨던 것 같다.
문득 편의점 알바를 처음 시작했을 때가 떠올랐다. 일을 배운 지 얼마 안 된 탓에 멤버십 할인창을 못 찾아 한참을 헤매고 있으니, 기다리는 손님 눈치가 보였다. 그렇게 이것저것 투닥거리며 누르고 있는 내가 안쓰러우셨는지
"괜찮으니까 천천히 하세요."
라고 말씀하셨다. 그 한마디를 듣고 나니 이상하게 급했던 마음이 진정되고 이내 창을 찾아서 해결할 수 있었다.
나도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라 실수로 목덜미에 중화액이 닿았을 때, “괜찮으니까 천천히 하세요."라고 한마디 건넸다면 어땠을까.
'뱉지 못한 말 한마디 때문에 이렇게 서로가 찝찝하진 않았겠지'라고 생각하며 입에 털어 넣은 딸기맛 사탕에선 왠지 모르게 씁쓸한 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