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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수

초단편소설

by 차여름


여전히 가장 아름다운 여보, 당신이 떠난 지 20년이 넘었는데 나는 아직도 당신이 그리운 밤이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이 같아. 살 사람은 살아야지 하며 악착같이 살아내다가도 문득 당신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질 때면 부치지 못할 편지만 주야장천 써 내려가. 내가 당신 곁으로 갈 때 다 가지고 갈 거야. 2박 3일 내내 밀린 편지나 읽어보라고.


김영감 알지? 예전에 화장품 회사 운영하던 놈 있잖아. 당신한테도 몇 번 갖다 주고 그랬잖아. 김영감이 회사 부도나고 잠적했었는데 최근에 우리 동네로 다시 이사를 왔더라고. 몇 년만이지? 당신 장례식 이후로 처음이니까 20년도 넘었네. 하여튼 이놈이 신기한 정보를 가지고 왔어. 아니 글쎄, 과거로 돌아갈 수가 있대. 추억광장에 있다고 가 보재. 추억광장이 어디지?


“유민아, 추억광장? 추억광장이 어디인지 알아? 여기가 핫하다고 해서.”

“네? 핫이 뭐예요?”

“인기 많은 거?”

“추억광장? 처음 들어보는데? 주소 있어요?”

“주소? 어디 보자, 김영감이 약도를 줬는데...”

“아~ 할아버지! 여기 거기잖아요! 예전에 저랑 공연 봤던 곳!”


손주 놈이랑 공연 보러 갔다는 얘기는 했었지? 그 공연장 건물 앞을 추억광장이라고 부르더라고. 나는 그냥 마당이 엄청 넓은 곳인 줄 알았지 뭐야. 묻는 김에 과거로 보내주는 타임머신 이야기를 했더니 역시 요즘 아이들답게 바로 핸드폰으로 검색을 해. 근데 아무 정보가 없대. 말이 안 된다고, 그게 가능하면 어떻게 후기가 하나도 없냐더라? 김영감 이 자식이 그냥 나를 놀려먹었다고 생각했는데 김영감이 펄펄 뛰며 자기는 이미 광장에 다녀왔다고 내일 광장에서 만나자고 하더라고.


광장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아. 마실 다녀온다 생각하고 슬슬 걸으면 30분이면 도착해. 확실히 낯익어. 유민이랑 왔던 곳이 맞아. 유민이가 타임머신은 거짓말이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우습게도 광장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어. 대부분 나 같은 노인들이고 중간중간 가끔 젊은이도 있긴 했어. 죄다 노인들이라 김영감을 겨우 찾았지 뭐야.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후기가 하나도 없어. 다들 구경만 하는 건가.


“아유, 한참 찾았네. 이리 와 봐. 내가 최 씨 얘기는 다 해 놨어.”

“무슨 얘기를 해 놨다는 거야?”

“정보를 입력해야 하거든. 내가 대충 간단한 정보는 다 얘기해 놨어. 이리 와서 설명 좀 들어봐.”


광장 군데군데 사람 모양 홀로그램이 타임머신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고,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홀로그램의 설명을 듣고 있었어. 기기가 없는데 대체 이걸 어디서 쏘는 거지? 신기하네. 사람이 일일이 설명 안 하고 홀로그램 시켜버리니 편하긴 해.


“주변 사람들은 본인의 기억이 아예 사라지거나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여 기억하게 됩니다. 이곳의 기억은 가지고 돌아갈 수 없어요. 로또 번호 같은 걸 외워가 봤자 소용이 없답니다! 과거로 돌아간 그 시점의 이전 기억만 살아있으니까요.”


홀로그램 설명을 듣고 있다 보니 이젠 진짜라고 믿겠어! 이게 가능한 일일까? 무슨 콘셉트를 잡고 이벤트를 하는 게 아닐까? 김영감이 다른 홀로그램 앞으로 데리고 갔어. 마녀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이 홀로그램은 자길 시간 재배치 전공 마녀라고 소개했어.


“후회가 없는 인간의 삶을 만들 수 있다는 명제를 증명하는 연구를 하고 있어요. 인간들의 삶엔 늘 후회가 있더라고요. 후회가 없는 삶이 가능한 걸까?라는 의문으로 시작된 이 연구에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삶이 후회되시는 분, 특히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려요!”


마법이라는 것도 웃긴데 인간이라는 표현도 재미있어. 마치 자신은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인 것처럼 말하잖아. 어느 회사에서 이런 이벤트를 만든 거지? 뭐든지 쉽게 과몰입하는 당신 같은 사람들은 좋아하겠어. 김영감이랑 건물 안으로 이어지는 긴 줄의 끝에 가서 섰어. 진짜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건물 안에도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가득할 것 같아서 말이야. 과거로 가면 어디로 가고 싶은지, 지난 20년간 어떻게 지냈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한참을 기다렸더니 우리 차례가 됐어. 첫 번째 공간은 병원 데스크 같은 곳인데 한 일행씩 들여보내주더라고. 김영감이 냉큼 가서 최 씨 데리고 왔다고 하니 데스크에서 바로 알아듣고 안쪽으로 들어오래. 원래 여기서 정보를 입력하고 설명 듣고 오래 걸리는데 나랑 김 씨 정보는 다 있으니 바로 들어가시면 된다고. 김 씨가 미리 내 정보를 입력해 뒀다더니 너무 편하네.


안으로 들어가서는 이제 개인전이야. 어두운 긴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엔 호텔처럼 여러 방이 있어. 각자 방에 들어가서 기다리래. 방은 좁고 단출해. 책상과 의자 2개. 뭐 이 정도? 방도 어둑하고 반짝반짝한 것들이 온 방에 떡칠되어 있어. 딱 계집애들이 좋아할 그런 느낌 알지? 당신이 왔다면 ‘어머, 너무 예쁘다!’ 하면서 한창 사진을 찍어대곤 했을 거야. 잠시 후에 그 수습마녀라는 사람이 왔어. 아까 홀로그램에서는 온통 마녀 같은 마법사 복장을 하고 있더니 막상 방으로 들어온 모습은 그냥 평범하게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젊은 여자였어. 아니 어리다는 표현이 맞을까? 약간 김이 샌 채로 마주 앉아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했지


“그냥 과거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 중 가장 후회되는 곳으로 갑니다. 되돌아올 수 없어요. 인생을 다시 사는 거죠. 주변 사람들은 본인이 원래 없다고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어 기억하니 걱정하실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이게 고문 수준의 봉사죠. 저도 너무 힘들어요. 아니지, 그래서, 어디로 가실 거예요?”


내 앞에 앉아있는 이 여자가 진심으로 힘든 표정과 말투여서 안쓰럽기도 하면서 웃기기도 했어. 어떤 회산지 모르겠지만 사회초년생을 너무 고생시키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야. 인생 중 가장 후회되는 곳이라니, 이건 무슨 이벤트일까? 설문조사 같은 건가? 도통 감이 안 잡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시겠죠? 잠시 후 다시 들어올게요. 이번에는 오랫동안 신중히 생각하셔서 결정해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대충 생각하고 대충 이야기했나 봐. 나는 그런 사람들하고 다르지. 매사에 신중하고 고민 많은 타입이라고 당신도 답답해했잖아. 그 정도로 조심스러운 사람인데 날 뭘로 보고.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어디로 가야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학생 때로 돌아가서 공부를 열심히 해? 그렇지만 그건 그렇게 후회되는 일이 아니야. 20대에 교수님이 제안했던 그 기업에 입사해? 그랬다면 커리어나 경제적인 부분은 당연히 나아졌겠지만 워라밸이 무너졌겠지. 그 기업에 가지 않은 걸 후회하진 않아. 40대에 이직 타이밍을 놓쳤던 곳으로? 이직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궁금하긴 한데 과연 그 선택이 진짜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60대 이후부터는 돌아가는 것이 의미가 없어. 역시 나는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어. 당신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더 많은 흔적을 남겨놨을 텐데.


“할아버지, 결정하셨나요?”

“네. 50대로 돌아가고 싶어요. 꼭 보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 더 보는 건 맞긴 맞는데, 그게 끝이에요. 그게, 진정 후회하는 일인가요?”


당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알았지? 아 맞다 내 정보가 여기 다 있다고 했지. 김영감이 이것까지 말했구나. 마녀(역할을 하는 사회초년생)의 말을 들으니 그 말도 맞긴 맞아. 그냥 당신이 한 번 더 보고 싶은 바람인거지 이게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일은 아니야. 후회에 초점을 맞추고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30살이 좋을 것 같아.


“30살이요. 뭐든 시작할 수 있는 나이인데 이미 늦었다며 그냥 주저앉아 게으르게 보냈어요. 지금 생각하면 30살은 어린 나이고 뭐든지 시작할 수 있거든요. 그렇지만 그 시기엔 찬란한 20대를 다 보내고 30살부터는 나이 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죠. 돌아가면 당장 찬물로 세수하고 고민만 하던 거 다 시도할 겁니다!”

“에휴, 또 30살이네.”

“다들 30살로 많이 가나 보죠?”

“음, 그렇죠. 그즈음으로 제일 많이들 가셔요.”


사람들이 많이 선택하는 나이가 마녀(역할을 하는 사회초년생)한테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선택을 했고 방을 옮겼어. 또 다른 방엔 MRI 찍는 기계 같은 거대한 캡슐이 있었어. 캡슐 밖으로 빠져나와있는 침대에 누우래. 꼭 건강검진 하는 것 같아. 병원과 다른 점은 여긴 어두운 방에서 무드등 몇 개의 불빛에 의존하고 있고 천장과 벽에는 꼭 우주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반짝반짝한 별빛으로 도배가 되어있어. 이건 무슨 체험인 걸까? 관 속에 들어가는 죽음체험도 아닌 것 같고, 우리가 우주로 날아가는 콘셉트이라 ‘지구상에서 우리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으니까 걱정하고 후회하며 살 것도 없다 ‘ 이런 류의 체험일까? 아니면 70살의 우리 몸도 사실은 30살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신체나이 되돌리기 체험일까? 잠시 후에 직원이 들어와서 내 옆에 서서 이야기해 줬어.


“한숨 주무시고 나면 30살 어느 날로 가 있을 겁니다.”

“그냥 잠만 자고 일어나면 되나요? 누가 깨워주시나요?”

“아뇨, 스스로 일어나실 거예요. 푹 주무세요. 그럼 30살의 어느 날 중 하루 자고 일어난 어느 시점일 거예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눈 뜬 날 그 이후의 기억은 사라져 있는 상태입니다. 현재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기억은 다른 기억으로 대체하여 기억될 거고...”


아까 들었던 얘기를 반복해서 또 듣고 있자니 지루해서 그런가, 방이 어두워서 그런가, 피곤하고 졸리지 않은데도 비몽사몽 늘어지더라고. 내가 누워 있는 침대가 캡슐 안으로 움직였어. 점점 잠에 빠져드는 게 느껴져. 신기하지? 약을 맞지도, 먹지도 앉았는데 말이야.


“제가 두 번이나 보내드렸는데 삶이 여전히 후회되는가 보군요. 후회하고 시간을 되돌리는 건 의미가 없어요. 마인드를 바꿔야지. 이런 시스템에 의존하면 바뀌는 게 없다고요. 모쪼록 세 번째 시도는 성공하시길....”





눈을 떴다. 유튜브 보다가 그대로 뻗었는지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켜보니 어제 보던 숏츠가 그대로 나오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알람 울리기 5분 전. 뭔가 억울해서 더 자려고 돌아누웠다가 벌떡 일어났다.

세수하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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