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억수로 내리는 4월 아침.
산책을 습관으로 잡는 데에 성공한 나는 그 어떤 궂은 날씨에도 밖으로 나갔다. '나는 댕댕이다, 매일 산책해야 한다'를 끊임없이 되뇌며 침대를 박차고 나왔다. 산책은 내게 그냥 운동화 신고 나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병원에서 수면 유도제를 아무리 세게 처방해도 매번 새벽 해가 뜨고 잠들던 내가, 산책을 시작하면서 잠 패턴을 정상궤도로 많이 끌어왔다. 어떤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느냐가 매우 중요했다. 그날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기쁨과 우울 사이를 심하게 오락가락하는 우울증 환자에게는 무엇보다 루틴이 중요했다.
이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겠지만, 내 순수 의지만으로는 산책 루틴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집을 나서야 고양이들을 볼 수 있고, 하루하루의 버캣리스트를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이 누워있던 나를 일으켜 세웠다. 모든 묘연이 소중했지만, 특히나 애틋하고 코끝이 찡해지는 아이는 마를린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고양이를 보기가 어렵다. 당연하다. 다들 비를 피하기 위해서 어딘가 숨어 있을 테니. 그럼에도 비 오던 4월의 그 아침에도 나는 운동화끈을 동여맸다. 날씨 탓을 하다 보면 점점 산책을 안 할 핑계만 찾을 것 같았다. 큰 기대는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양이 간식을 넣은 가방도 우산과 함께 챙겨 나갔다.
인생은 예측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마를린!"
마를린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길 한가운데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마를린을 부르자, 그는 나를 알아보고 꼬리를 세우며 다가왔다. 비에 쫄딱 젖은 상황에서도 반가웠냐.
마를린은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끝없이 울었다. 인간인 내 귀에는 그 소리가 구슬프고 서럽게 들렸다. 쌀쌀한 날씨에 비까지 맞아버린 마를린의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났다. 일단 간식부터 꺼냈다. 평소에는 한 고양이당 닭가슴살 한 개씩만 주는데, 이날은 조금이라도 힘내라고 두 팩을 꺼냈다. 다행히도 강제 냥빨(?)을 당한 마를린은 평소와 같이 간식을 잘 먹었다.
마를린이 허겁지겁 간식을 해치우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문득 마를린이 중간중간에 털을 계속 정돈하고 있다는 게 눈에 띄었다. 빗물을 조금이라도 닦아내려는 시도였을까? 우산을 바닥에 세워놨다. 마를린은 '?' 물음표 그려진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우산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아까 미처 못한 그루밍을 재개했다.
한 15분 동안 같이 있었던 것 같다. 우산을 내주는 바람에 나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우산이 두 개였다면 이런 비효율적인 문제가 없었을 텐데. 편의점까지 가기에는 멀었고, 그 사이에 마를린이 사라질 것 같아서 나는 그냥 내 우산을 세워두고 마를린이 잠시라도 비를 피하길 바랐다. 15분이 20분이 되면서 으슬으슬한 기운이 내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러다 내가 감기 걸리겠네.' 이기적이지만 그 와중에도 내 몸을 먼저 생각하는 나였다.
나는 우산을 다시 가져가는 몸짓을 했다. 마를린은 알아들었다는 듯, 우산에서 나왔다. 내 옆에 풀썩 엎드리고 젖은 식빵을 굽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또 울컥하는 인간.
항상 그랬던 것처럼 마를린은 내가 가는 길을 어느 정도 배웅하다가 멈춰 서서 내가 멀어질 때까지 지켜봤다. 빗속에서도 한결같은 모습을 보이는 마를린의 모습에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이 모습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리며 마를린에 대한 미안함, 안쓰러움을 표했다. 곧 고양이를 좋아하는 지인에게 DM이 왔다.
"이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튼튼해요. 우리는 비를 맞으면 바로 감기가 걸리겠지만 우리보다 길에서 오래 버티고 살아남은 아이니까 큰일 없을 거예요. 아이들을 믿고 내일 또 만나러 가요.
나는 그의 메시지를 읽고 조금은 안도하는 마음으로 산책길을 나섰다. 물론 길에서 치열하게 살아남아야 하는 고양이들이 전혀 힘들어하지 않는다, 이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다만 추운 겨울도 바깥에서 버텨냈을 마를린이 자신의 삶을 이끌어간 힘과 체력을 인간이 멋대로 과소평가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나는 지인의 말을, 그리고 마를린의 힘을 믿기로 했다.
다음 날, 나는 왠지 조급한 마음으로 공원에 도달했다. 다행히 이날은 비가 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먼로가 마를린과 함께 있었다. 어제의 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보송보송한 털과 나른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그의 여유로운 표정에는 꼭 '나 잘 있어~걱정 마'라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마를린은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