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오답노트 01화

Prologue : 나는 어딘가 망가졌다

01. 글다운 글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by Kyle Lee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 짙푸른 강물 속을 헤엄치는 꿈.


흔들리는 물살을 따라 스며든 햇살이 소복이 쌓이는 눈처럼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너울대는 빛에 넋을 놓고 있던 것도 잠시, 빛의 커튼을 가르며 나타난 물고기 떼가 옷 속으로 파고든다. 펄떡대는 지느러미의 감촉이 온몸을 훑는다. 그리고


언제부터 눈을 뜨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꿈과 현실의 그 어느 사이에 발이 걸려 넘어진 것만 같다. 지진처럼 고동치는 심장소리가 귓가에 울려온다.




“좋은 꿈이에요. 태몽일 수도 있고, 아니면 긍정적인 미래의 암시일 수도 있고.”


타로 카드라면 용한 무당 못지않은 친구의 카톡창에 추켜올린 엄지손가락이 몽실몽실한 푸딩 같다. 뭐라고 답을 하면 좋을까. 이모티콘 아래 깜박이는 커서에 나는 한참을 답하지 못했다. 여전히 나는 꿈과 현실 그 어느 사이에 넘어진 채다.


회사를 그만두었다. 몇달 전의 일이다. 나의 이름을 수식하던 소속과 직급이 사라졌다. 스타트업의 패기 넘치는 젊은 임원이라는 환상. 신기루. 막 털을 깎고 나온 양처럼 앙상한 이름 석자만 덩그러니 남았다.


“앞으로 뭘 할지 계획은 세운 거야?”


이만 회사를 나가겠다는 말에 상사가 내게 물었고, 나는 글을 쓰겠다 답했다. 일생의 가장 큰 꿈이라는 말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나중에 식사나 한 번 하자고 말하며, 그는 웃고 있었다.




대학 후배를 만났다. 거의 1년 반 만이었다. 나보다 먼저 창업 시장에 뛰어들었던 그녀는 지나간 시간의 껍질을 벗겨 마주 앉은 테이블 위로 늘어놓았다. 투병 중이시던 아버지의 장례식. 억 단위의 빚 만을 남긴 채 폐업 수순에 들어간 창업가의 꿈. 빚에 쫓기는 현실에 쫓겨 닥치는 대로 달렸다며, 정신을 차려보니 준전문 방송인이 되어있더라는 이야기. 어쨌거나 밥은 먹고살 수 있다며 웃는 그녀에게서 상쾌한 풀냄새가 난다. 봄날 아침 이슬을 가득 머금고 기지개를 켜는 짙은 생명의 향기.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것이 있다.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것이 있다고 그녀가 말한다. 사업의 실패와 믿었던 동료의 배신으로 받게 되었던 정신적 대미지는 상당했다고. 문제가 악화일로를 걷다가 바닥을 쳤고,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자신을 좀먹어가던 시간이 대략 1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그렇게 끝을 알 수 없는 터널을 계속 걸었고, 작년이 되어서야 누군가를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고 한다.


혹시 그때의 자신을 기억하느냐고 묻는 그녀. 마지막으로 나를 만나 나누었던 대화가, 아니, 그 당시 만났던 사람들과 나누었던 대화가 통으로 삭제된 것만 같다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 만난 주변 사람들을 통해 낙엽같이 흩어진 기억의 조각을 그러모으고 있다면서. 그렇게 모인 그녀의 자화상은 마치 다른 사람이었던 것만 같다고.


그렇게 한참 밀린 이야기를 쏟아내던 후배가 내게 물었다. 오빠는, 세상 바쁜 척은 혼자 다 하던 당신은, 대체 어떻게 지냈느냐고.


“어딘가 망가진 것 같아.”


내가 답했다. 키가 망가져 먹통이 된 키보드처럼, 혹은 펜촉이 비틀어진 만년필처럼. 내 안을 채우던 단어들이 모두 공기 중에 흩어지고 껍데기만 남은 것 같다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허공에 질문을 던진다. 맥락 없이 떠오르는 단절된 기억의 마디마다 꼬리와 머리가 달려 멋대로 뇌수를 바다 삼아 헤엄친다.


문득, 내 몸을 훑고 지나갔던 무지갯빛 영롱한 물고기 떼가 떠오른다.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친구의 추켜세워진 엄지 손가락 끝이 몽실몽실 흔들거린다.


행운이라니. 그건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이다. 내가 혁명의 총알이 빗발치는 19세기 파리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과 같은 논리로, 그 행운은 저 멀리 무지개 건너 오즈의 에메랄드빛 도시에 사는 누군가의 몫일 것이다. 지독한 악운이 내 삶에 자리하지 않았던 것과 같이 거대한 행운이 내 삶을 찾아오는 일도 없다. 예상할 수 있는 만큼, 딱 대비할 수 있는 그 정도로 내 삶은 앞으로 나아간다.


20211128_00. 나는 어딘가 망가졌다_물고기를 품은 사람 (1).jpg instagram : @maywithmayday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지. 봄 햇살을 받으며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올림픽 공원을 가로지르는 산책로. 갈대가 바람에 흔들렸고 희미하게 먼지 냄새가 났다. 몽골에서 날아온 황사다. 달무리 지듯 뭉개진 햇빛이 습한 열기를 더해간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부표처럼 떠도는 생각들을 씻어 내린다. 거칠어져 가는 숨소리만이 머릿속을 채우고, 두 귓가에는 소리의 기호들만이 비누거품처럼 둥둥 떠올라 허공으로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태풍이었을 것이다. 아주 긴 시간 동안, 나는 보이지 않는 태풍 속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세찬 바람에 오감을 빼앗겨, 그저 발걸음을 앞으로 앞으로 옮겨왔다. 칼날 같은 바람은 분명 내 몸에 상흔을 남겼다. 휘날리는 부유물에 부서지고 찢기며 피를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빼앗긴 감각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고, 나는 그저 묵묵히 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앞으로 걷는 것뿐이었다.


태풍이 오고 있다.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 선다. 찢어진 상처도, 부서진 뼈도 보이지 않는다. 시선이 미치는 모든 곳이 반듯한 표정으로 내 눈을 마주한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짙은 어둠 속에서 물방울이 맺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상처 사이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세찬 바람 소리. 태풍이 오고 있다.


잠시 주저앉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나는 잠시 주저앉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어딘가 고장 나 버리고 말았다. 보이지 않는 상처가 벌어져 피가 흐르고 있다.


벌어진 상처를 소독하고 꿰매야 하며, 썩은 살을 베어내고 고름을 짜내야 한다. 거즈를 덮고 붕대를 감아 충분한 시간을 들여 상처를 돌봐야 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글다운 글을 쓰지 못하게 되었음을 받아들인다. 대신, 뭐라도 써보자고 마음먹었다. 기억, 꿈, 상처, 회복, 후회, 영광, 그리고 환상. 꿈처럼 현실처럼 머릿속을 스쳐가는 모든 것들을 다듬어보기로.


부디, 이 글의 끝에 태풍이 잦아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가의 말]

글 : Kyle Lee (https://brunch.co.kr/@kylelee)
"새롭게 에세이 연재를 시작합니다. 매주 일요일 저녁에 찾아오겠습니다."

그림 : 매이 (instagram : @maywithmayday)
"세상 모든 물고기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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