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0일의 기록. 이것은 나의 일기. 나의 삶의 이야기.
며칠 비가 내리더니 큰 눈이 왔다.
눈이 오던 날, 나는 차를 몰고 일산을 향하고 있었다. 진품 검증을 마친 그림을 되찾아 오기 위해서였다. 백십사 년 만의 폭설은 도로 위의 모든 것을 지우고 있었다. 차선은커녕 앞을 달리는 차의 꽁무니 마저 희끗한 눈보라에 덮였다. 편도 육십 킬로미터의 여정에는 미끄러져 닿지 말아야 할 것에 닿은 차와 눈 속에 빠져 헛바퀴를 도는 차로 가득했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고, 오르막에 헛도는 바퀴의 회전수만큼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한 달가량 기억을 더듬고, 그림 속에서 자신의 흔적을 찾던 작가는 마침내 진품임을 인증하는 작품카드를 발급해 주었다. 오십 년 전 자신이 그렸던 그림은 그토록 자신에게도 낯설었던 모양이다.
그렇겠지. 오십 년이다. 그 시절 청와대의 주인은 군부였고, 머리에 뿔이 난 공산주의 괴뢰군이 아이의 입을 찢어 죽인 것에 분노하던 시절이었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 전, 우리 부모님이 아직 대학생이던 시절에 그려진 그림. 까마득히 먼 기억을, 작가는 더듬고 더듬어 그 시절 자신의 붓이 캔버스를 스치던 감각을 떠올려야 했을 것이다.
그림의 이름은 팬지. 멀리서 보면 왠지 모르게 이파리가 바람에 사르르 떠는 듯 보이는, 들밭에 부는 바람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눈이 오고 순식간에 대기가 얼어붙었다. 채 지지 못한 알록달록 은행잎이 지기도 전에 쌓인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사정없이 부러져 내렸다. 무릎까지 쌓인 눈 속에 잘못된 기억처럼 묻힌 가을의 흔적.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선물 받은 책을 읽고 있었다. 한강 작가의 <이별하지 않는다>라는 소설이었다. <소년이 온다>와 세트로 받은 선물이었다. 굳이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가지고는 있으나 읽지 않고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펼치지 않았던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손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읽어야 할 책은 많고, 더 중요한 것이 많았으며, 나는 이 모든 걸 제 때 해낼 만큼 충분히 부지런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 밤에,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뉴스가 흘러나왔다.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국민의 힘에서 사무를 보는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으나 그는 다음 날 아침이 될 때까지 답을 하지 않았다. 문재인 시절 청와대에 보좌관으로 있었던 친한 형님에게도 문자를 했으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답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왔다.
탄핵 소추안 투표가 있던 밤 아이의 열이 올랐다. 삼십 구도를 넘긴 열은 좀처럼 내려갈 줄 몰랐다. 아내의 PCR검사를 통해 아이가 메타뉴모 바이러스(Metapneumovirus)에 감염되었단 것을 알 수 있었다. 며칠 전 어린이집 선생님이 열감기가 유행이라며, 최대한 조심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던 것이 떠올랐다. 조심하고 있다는 것에 안심해서는 안되었던 것인가. 그 말은, 어린이집에 열감기가 돌고 있어 감염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간접화법이었음을 나는 왜 이제야 깨닫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자책했다. 이 어린것이 무슨 죄라고.
나흘이 넘도록 아이의 열은 떨어지지 않았다. 온몸을 구부린 채 엎드려 쌔근거리는 아이의 가래 끓는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홀딱 벗긴 아이의 몸을 젖은 물수건으로 반복하여 닦아낸다. 겨드랑이와 목을 훑고 지나가는 서늘한 느낌에 아이는 선잠에서 깨기를 반복하며 찡얼댄다. 잠복기를 지나 온몸에 염증과 함께 퍼진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는 크기의 몸뚱이로 그동안 많이 컸다 느꼈던 아이의 체온을 위험수위로 올려놓는다. 곧 숨이 막힐 것처럼 그릉거리는 아이의 숨소리가, 내리지 않는 체온이, 비틀대는 아이의 걸음이, 잘게 갈아낸 사과즙도 넘기기 힘들 정도로 부어오른 목이, 평온에 젖어있던 나를 힐난하는 채찍이 되어 날아든다. 이 세상은 메타포로 가득 차있다. 간접 화법이었으며, 우회적 표현이자 의도된 가든패스 문장이었다. 나는, 깨어있어야 했다.
12월 10일 밤. 여전히 아이의 열은 떨어지지 않는다. 의사 선생님은 이 열이 일주일 정도는 갈 것이라 했다. 어쩌면 폐렴으로 넘어갈지 모르기에 매일 병원에 데려와 상태를 확인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언제고 폐렴으로 넘어갈지 모른다. 그때는 정말 입원을 해야 한다. 나 혼자 어떻게 되는 수준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나의 일기. 지난 시간 우연처럼 흘러간 기록이자, 제 때를 빗겨 내린 눈 같은 것.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걸어볼까. 이미지의 배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처럼. 이것은 나의 일기. 나의 삶. 이것은 정치 이야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