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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미 Nov 12. 2019

아줌마의 기억법

어젯밤. 그냥 조용히 얌전히 잤어야 했다. 
그랬다면 아침에 맑은 머리로 일어나 그 난리를 치진 않았을테니까 말이다.
큰아들 친구 중 두 명이 군대 첫 휴가를 나왔다. 더벅머리 때부터 보던 놈들이 빡빡이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나자 콧날도 시큰하고 마음이 짠해졌다. 내 그래서 큰소리를 쳤다. 
 

"오늘은 너희들 맛난 거도 좀 해 먹이고 냉장고에 맥주도 빵빵하게 채워줄테니 마음껏 놀아라!!"

  

장보러 나온김에 며칠 전 수선 맡겼던 바지를 찾았다. 시장 보는 동안 들고다니기 뭐해서 물품 보관함 7번에 넣어두었다. 대형마트는 넓고 물건만 많았지 어쩔 땐 사고 싶은 게 꼴뚜기 대가리 만큼도 없을 때가 있다. 어제가 딱 그랬다. 맛있는 거 해주마하고 큰 소리 치고 나왔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내 솜씨를 부릴 만한 게 없었다. 뭐 그래도 대충 30% 세일하는 코너에서 몇 개 건지고 3980원에 각휴지 세 개짜리가 보이길래 그것도 하나 샀다. 물론, 나오기 전에 물품보관함 7번에 가서 수선한 바지를 찾았다. 


집으로 오는 길에 동네마트에 들러 맥주 6팩짜리 두 개와 피쳐 2개를 사고 물이 좋은 대하가 열 마리에 9900원 하길래 씨알 굵은 놈으로 스무 마리 골라담았다. 생선가게 아줌마에게 생글생글 웃으며 
 

"너무 친절하셔서 꼭 여기서만 산다니깐요 제가~"


요래 말하고 3마리를 더 얻어 담았다. 칠리새우를 해서 아들과 친구들까지 넷을 배불리 먹일 수는 없지만 일단 메인요리는 쫌 있어보이는 걸로 해놓자 싶었다. 그 다음에야 지들이 컵라면으로 못다한 배를 채운다한들 내 알바 아니다. 그런데 아 짜증. 여기서는 각휴지 세 개짜리를 2980원에 팔고 있었다. 이런 건 무조건 사야된다. 이러다보니 자꾸자꾸 짐이 늘어났다. 포장코너에서 박스에 무거운 것만 추려 배달전표를 붙여놓고 그곳을 나왔다.

이젠 집으로 가자... 하다가 생각난 또 하나. 큰아들이 <와사비덮밥>을 꼭 사다 달라고 했다. 가는 길이니 까짓 거 사가자 싶어 도시락가게도 들렀다. 맥주는 무겁지만 배달시키지 않고 기어이 둘러메고 왔다. (맥주는 살얼음 동동띄워 마셔야 제 맛인데 배달시킨 게 늦게오면 애들이 미지근한 맥주를 마셔야 하므로.)


드디어 집으로 온 나는 냉동실에 맥주부터 얼른 넣어두고 새우 손질을 했다. 아이들이 PC방 갔다 오후 7시쯤 다시온다고 했으니 서둘러 안주를 만들어야 했다. 머리떼고 껍질벗긴 새우로 칠리새우를 만들어 대따 큰 접시에 담고 포크 4개를 찔러넣었다.


"새우깡 아니다. 음미하며 감탄하며 먹어라!"
"와~ 어머니 최고래요. 뭐가 이리 맛있어요!"
"어머니는 왜 볼때마다 살이 자꾸 빠진대요!"
"저 진짜 군대가서 어머니 엄청 보고 싶었어요!" 
"야~ 니들은 군대가서 아첨만 배워왔냐!"


그래 딱 고기까지 했어야 했다. 칠리새우(입)발린 소리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아들들 노는데 끼었다 빠졌다 기웃거리며 술을 홀짝홀짝 마셔대고 있었다. 그러다 잠이 들었고 아침에 눈을떴다. 물을 꺼내려 냉장고 문을 열어놓고 생각했다.


"어제 수선집에서 찾은 바지 봉투는 어디갔지?"
 


집에는 분명 없었다. 어제의 일을 아침부터 순서대로 더듬었다. 분명 동네마트에 갔을 때 카트 손잡이 빨간받침에다가 그걸 올려놓았어. 그건 분명히 기억나. 서둘러 동네마트로 갔다. 하지만 그곳에 바지는 없었다. 바지봉투를 분실했다고 울먹이자 한 젊은이가 나를 CCTV 녹화실로 데려갔다. 영수증에 나온 시간대로 돌려 같이 찾아보자면서.


잘생기고 친절한 그 젊은이는 끈기있게 화면을 들여다 보고있다가 드디어 나를 찾아냈다. 양 손에 각 휴지를 잔뜩 들고 봉투를 짊어진 내가 거기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잃어버린 바지 봉투는 아무리 찾아보고 돌려봐도 흔적조차 없었다. 혼탁하고 뻑뻑한 머리를 다시 굴려 보았다. 젊은이는 홈플러스에 가서 한번 찾아보라고 내가 착각한 거 같다고 말했다.


"그건 그렇지 않아요. 7번 보관함에서 분명 찾아나왔다니까 그러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하지만 그 젊은이 말대로 홈플러스 말고는 달리 가 볼 때도 없었기에 마지못해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분실물 센터에 가서 상황설명을 했다. 물어보나 마나였다. 없다고 했다. 있을 리가 없지. 내가 분명 기억이 나는데 그러네. 여기 7번 보관함에서 찾아가지고 나왔는데 무슨. 저 봐. 열쇠까지 꽂혀있잖아. 
 

가서 안을 한번 쓱 들여다보았다. 근데 거기 뭐가 있다. 하얀 봉투다. 그것도 바지가 든 내 봉투가 거기 얌전히 놓여있었다. 나는 이제 내 기억을 깡그리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망상과 실제 사이를 떠돌며 <네 기억을 절대 믿지말라>던 설경구의 눈떨림이 갑자기 나에게도 일어날 것 같은 이 불안감. 
아.. 알콜성기억분실물센터...


대뇌피질 아래 살고있는 나의 해마에게.
 <미안하다 진짜. 이젠 적당량만 마실게. 내 기억을 믿고 살게 도와주면 고맙겠구나. 네가 건강해야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단다. 그럼 안녕!!>


(열쇠를 꽂고 바지봉투를 꺼내려던 순간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고 나는 문자확인을 한 다음 바지는 꺼내지 않고 유유히 그곳을 떠났던 것이었다. 혹시 궁금한 분이 계실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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