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가끔 몸이 안 좋을 때면 그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정말 먹지 말았어야 될 것을 두 번 먹은 적이 있다. 물론. 죽으려고 먹은 것은 아니다. 어쩌다 보니 먹었다.
그 첫 번째 사건.
큰언니가 예전에 과천에 살다가 친정집 근처로 이사를 오게 됐다. 이삿짐 싸는 걸 도와주면 거금 5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대학 다닐 때니까 제법 큰돈이었다. 설렁설렁 짐싸는 흉내만 내면 되겠지 싶어 가겠노라고 했다. 그런데 웬걸. 막상 가보니 싸고 버리고 옮기고 치워야 할 것이 장난 아니게 많았다. 어쩐지 그 큰돈을 준다 하더라니. 악덕주인이 5만원의 뽕을 뽑겠다고 내 이름을 오만 번쯤 불러댔다. 돈만 아니었음 당장이라도 튀어나오고 싶었으나 나에겐 친구들과 먹고 마시고 즐길 돈이 필요했다.
"옜다 5만원. 일 한 건 별로 없지만 약속이니까."
난 이래서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 싫다. 싸가지가 없고 남 힘든 걸 모른다.
"밥 줘! 일 시켰으면 배는 채워줘야지."
"어머. 돈 줬잖아. 나가 사 먹어라."
"짐 다시 푼다!"
언니는 내가 한다면 하는 아이라는 걸 알고있었으므로 조용히 라묜을 끓여왔다. 너무 배가 고파 웬만해선 다 맛있게 먹을 자신이 있었다.
"라면에 간장 넣었어? 왜 이렇게 짜!!"
"어. 조금 넣었지."
미친다. 라면에다 설탕은 왜 안넣나 몰라. 국간장 끓이면 진간장 되는 줄 아는 여자한테 뭘 더 바래.
"물 줘. 무울~~"
"어머. 물이 없네. 음.. 언니가 원두커피 끓여줄까?"
간장라면 먹고 혀가 오이지가 된 이 시점에 원두커피를 끓여? 내가 이래서 공부 잘하는 것들은...
대충 수돗물로 입가심하고 집에 가려는데 언니가 붙잡는다.
"원두커피 한 주전자나 끓였어. 마시고 가야지."
정말 0.1%도 마시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큰언니가 왠지 그날따라 좀 외로워보였다. 주머니가 두둑하니 기마이 뽕으로 그 날은 언니 집에서 자기로 했다. 나는 큰언니와 12살 차이가 난다. 그러다보니 어렸을 땐 큰언니 눈에 내가 인간으로 보였다기 보단 그냥 꼬물이로 보였단다. 급이 틀리고 레벨이 달라서 대화란 걸 별로 하고싶지 않은 올챙이 말이다. 그런데 내가 대학에 가고나니 이제야 눈 코 입 달린 인간정도로 보이기 시작한다며 깔깔 거렸다. 우린 밤 늦도록 수다를 떨었다. 언니가 부어주는 원두커피를 마시면서 말이다..
"근데 언니. 언니는 왜 커피 안 마셔?"
"불면증이라 안 마셔."
"아이스크림에 쨈까지 넣어 먹으면 달지않아?"
"언닌 날씬해서 괜찮아. 넌 이렇게 먹음 안 되겠지만."
내가 이래서 공부 잘하는 것들은...
"근데 언니 집에 원두가 왜 있어?"
"누가 선물로 줬어. 방에 걸어두라고."
"방에? 원두를 방에 왜 걸어둬?"
"그거 있잖아. 망에다가 원두 넣어서 걸어두는 거."
" ...... 그거.. 갖고 와봐봐봐~~!!"
언니는 말간 얼굴로 나에게 원두를 내밀었다.
"이.. 이..이건 바..방향제자놔아아~~ 미친거야?!!"
큰언니는 원두모양의 방향제를 큰 주전자에 넣어 푸욱 삶은다음 나에게 먹인 거였다. <식스센스>에서 새엄마가 아이를 죽이려고 음식에 락스를 타먹였듯이 언니는 아무 잘못도 하지않은 착하고 순수하고 예쁘기까지 한 막내동생에게 방향제를 삶아 먹인 거다. 언니는 정말 몰랐다며 자기가 커피를 즐겨마셨다면 분명 자기가 먼저 마셔버렸을 거라며 괜~차나 괜~차나 이렇게 거짓말을 씨부리다가 엄마한테는 절대 일러주지 말라며 3만원 정도는 더 줄 수 있다고 부지런히 나를 구슬렀다. 나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눈물까지 보이며 웩웩~ 구역질을 해가며 5만원을 더 받아냈다. 물론. 집에 가자마자 엄마한테 일러줘버렸지만 말이다.
암튼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속이 뒤비지면서 헛구역질이 나온다. 두고두고 괘씸하다. 몸이 안 좋을 때면 속에서 원두 방향제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다. 방향제 삶아먹으면 죽나 안 죽나 궁금해하는 사람이 주변에 혹시 있으면 <죽지는 않는데 두고두고 기분이 찝찝하고 몇 십년 뒤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이라고 알려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