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장례식
너무나도 슬펐고 또 슬펐다. 그냥 커다란 나의 바다가 나를 삼킨 듯 나는 또 슬펐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이자 나의 버팀목인 아빠가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다.
아빠는 꽃을 참 좋아하셨다. 벚꽃이 만개해 떨어지려던 그 막날. 호흡곤란이 올 수 있다는 의사의 우려 속에서 산소호흡기를 하고 우리 모두는 꽃을 보러 나갔었다. 흐드러진 그 꽃잎과 아빠의 웃음과 그리고 걸었던 그 길을 잊지 못한다. 그렇게 아빠와의 마지막 꽃잎은 떨어졌고, 나는 새벽에 떨어지지 않으려는 둘째만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아이를 안고 있으니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졸린 눈을 비비며 나를 따라온 여섯 살은 칭얼거리려고 따라온 것이 아니었다. 나의 그 뜨거운 눈물을 닦아주며 나를 토닥였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얼굴을 어루만져주었다. 나는 그 손을 꼭 잡았고 힘을 내어 장례를 준비해야 했다. 잘 가요, 내 사랑..
장례를 위해서 뭘 먼저 준비해야 할까?
며칠 전부터 가족들은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다. 뭔가 불안한 기운이 집 안을 감싸고 있었다.
첫째인 나조차도, 그 순간이 다가오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몰랐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준비라는 행위 자체가 너무 슬프게 느껴졌고, 그래서 가족들과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기가 왔다. 작은 것부터 하나씩 준비를 시작했다.
첫 번째로 종교적인 준비였다. 어머니의 가장 큰 걱정은, 병간호로 교회를 거의 가지 못했던 지난 시간이었다. 장례 예배조차 드리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이셨다. 나는 나의 교회 목사님께 연락을 드렸다. 오랫동안 참석하지 못했던 것에 죄송한 마음을 전하자, 목사님은 오히려 나를 위로하셨다. "미안해하지 말아요. 마음이 이미 충분히 예배였습니다." 그 한마디가 어머니와 나, 모두를 조금 가볍게 해 주었다.
다음은 장소의 선택이었다. 병원 장례식장은 편리하지만, 나는 그곳에서의 기억이 힘들었다. 아픔을 견디는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를 것 같았다. 그 장면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족들과 의논 끝에 모교 병원의 장례식장을 떠올렸다.
그 선택에는 아버지를 위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모교 병원 장례식장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교우회 평생회비를 냈다. 유료이긴 했지만, 근조화환과 근조기, 장례식장 할인 혜택이 있었다. 무엇보다 학교 교우회 이름으로 보내지는 근조화환은 아버지가 생전에 좋아하셨던 그 학교의 향기를 담아드리는, 내가 드릴 수 있는 작고도 특별한 기쁨이었다. 규모는 우리 가족 수에 맞게 적당했고, 서울에 위치해 조문객들이 찾아오기에도 편했다.
그렇게 우리는, 감정의 무게와 현실적인 여건 사이에서 가장 온전한 선택을 했다.
새벽 3시.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마주한 엄마를 보고선, 그때부터는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새벽에 장례식장에 연락을 했다. 서울 서대문에 있는 병원에서 안암동으로 새벽길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았다. 내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장례식장엔 너무나 감사하게도 한달음에 와주신 교회분들의 예배가 함께했다. 국가대표인 후배는 대회 중 멀리서 근조기를 보내왔고, 나의 회사 동료들은 점심시간부터 한달음에 달려와 위로해 주었다. 점점 친구가 줄어드셨던 아빠시지만, 사업을 하시는 아빠 친구분은 한달음에 달려와 자식들인 우리를 위로해 주셨다. 그 모든 걸음이 너무너무 감사했다.
장례식장에서는 뭘 해야 할까?
장례식에 가는 것도 어색해했는데 장례를 치르는 것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슬퍼하려 하는데 자꾸 결정해야 할 것들이 생겼고, 슬픔에 빠져 죽고 싶은데 몇 년간의 병원 생활에 비용을 '따져야'하는 상황이 정신을 자꾸 들게 했다. 물론 나는 슬픔에 젖어있었고 '어떻게'에 대한 회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남편과 장례지도사님이 그 장례의 선택을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해주었다.
경비도 결정해야 하지만 중요한 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가 중요했다. 하지만 결정하고 나서 '아쉽다'라고 할 수 없는 과정 중 하나이다. 정해진 품목들 중에서 '부족함 없는 품목의 정도'를 제안받고 이를 기준으로 더하고 덜해야 한다. 경험이 많으신 장례지도사님의 조언이 매우 중요하다. 기본 품목비는 낮추더라도 고인의 가시는 길에 부족함이 없길 바라는 마음이 초조해지기도 한다.
상조상품을 가입해두지 않아 걱정부터 했지만, 장례식장에서 제공하는 장례품목은 미리 상조상품을 준비하지 않았어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유족들이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에 장례지도사님께서 도우미 분들과 면밀히 살피시며 장례 품목들을 관리해 주신 부분이 컸다.
울지는 않았지만, 나는 넋이 빠져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연락해야 할 사람들에게 연락도 더 많이 했어야 했고, 웃음이 나지 않아야 하는 게 맞았는데 아빠를 보여 동생들과 웃으며 얘기도 했다. 엄마 아빠는 바다를 원하셨지만 자식들은 그래도 가볼 수 있는 산을 원했다. 납골당도 많이 가본 적 없는 자식들의 입장에서 가격이나 규모를 정하는 과정도 혼란이었다. 거리는 강원도이지만,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고 가는 동안 산자락의 꽃들과 겨울의 나무들을 볼 수 있는 미술관 속 납골당으로 정하였다. 나는 참 마음에 들었다.
슬픔 속에서 현자의 결정을 기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중요한 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데 모두의 마음에 들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다만,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결정인가'에 초점을 맞춘다면, 결과에 큰 탈이 없다.
발인을 위해 이동한 강원도. 산자락에 핀 꽃들을 보니, 그리고 납골당에 모시고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니 멈췄던 눈물이 그렇게나 흘렀다. 산자락에 흐드러지게 핀 진분홍 벚꽃이 눈물에 갇혀 연분홍이 되었고, 또다시 진분홍이 되었다가 연분홍이 되었다. 얼마나 반복되었던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정신없이 5월의 마지막까지 흘러내려와 있었다.
엄마는 걱정했었다.
병간호로 준비할 겨를도 없었던 그 장례가 초라할까 봐..
하지만 아빠의 마지막 길이 생각보다 풍성했고
살아생전 가족들에게 고마웠다고,
그 마음을 표시할 수 있었던 것 같아 감사했다
- 친정 엄마와 납골당에서 돌아오는 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