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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 Oct 20. 2024

25. 살고 싶은 집을 직접 설계한다는 것

발리에 <내 집짓기>

건축의 기초적인 부분은 조로님과 내가 추구하는 바가 같아 이 부분은 전문가에게 맡겨 보기로 하고 나는 집 구조에 대한 자료를 꾸렸다. 설계는 집을 짓기 위한 설명서를 만드는 작업이니 일단 내가 원하는 바를 아낌없이 다 전달해야 이를 토대로 조로님이 설계를 해 주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살면서 이런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는 이미 만들어진 집에서 평생을 살았다. 평범한 한국 가정에서 태어난 나는 주거지라면 아파트, 빌라가 내가 가진 경험의 전부였고 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사는 동안에는 홈스테이(민박집) 방을 전전했다. 언젠가 열심히 살다 보면 한국에든, 발리에든, 어디에든 내 집이 생기겠지 라는 막연한 소망을 품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이렇게 다가와 줄 줄은 몰랐다. 그동안 집은 짓는 게 아니라 빌리거나 사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집을, 단독주택을, 짓는다고? 그것도 발리에? 이렇게나 말도 안 되는 일을 내가 벌였다. 그동안 발리를 떠나지 못했던 것도, 만족할 만한 집을 그토록 찾아 헤맸는데 찾지 못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나 보다. (신은 다 계획이 있구나?)

오랜 시간 준비한 만큼 나 역시 내가 짓고자 하는 집의

청사진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가 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이것들은 조로님께 잘 전달해 드리면 된다. 나는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원했던 집의 모습을 그려나갔다. 만드는 내내 마치 유리처럼 맑고 매끄러운 파도를 타는 것처럼 아이패드의 내 손은 스무스하게 움직였다.


1층과 2층의 구조

혼자 사는 공간이지만 나중에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방문할 것을 대비해 두 개의 침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두 개의 침실을 일층에 배치고 거실이나 부엌을 넓게 가져가려고 하니 땅의 면적이 부족할 것 같아 이층을 올리고 남는 공간에는 넓은 정원과 넉넉한 주차 공간을 만들어야지 싶었다.

집의 구조는 나의 라이프 스타일을 최대한 반영했는데 집에서 온라인으로 일을 하고 있어, 일을 하는 공간과 쉬는 공간을 각각 1층과 2층으로 확실히 분리했다. 그래서 1층은 손님방, 화장실, 부엌과 거실이 있고 2층은 온전히 내가 쉴 수 있는 곳으로 공간들로 구성했다.

1층 거실은 텔레비전과 소파가 있는 보편적은 거실과는 달랐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의식적으로 이런 것들을 멀리하고 싶어 한국의 거실 형태의 공간은 과감히 빼고 이 자리에 아주 큰 원목 테이블을 놓아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최대한 자연광이 많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한쪽 면에 큰 창을 내어 달라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바로 정원으로 나갈 수 있는 슬라이딩 도어도 만들어 달라고 했다.

또한 요리를 좋아하는 나는 부엌이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혼자 살기 때문에 수납은 충분할 것 같아 상부장을 과감히 없앴다. 대신 원목 선반을 설치하고 그 위에는 큰 창문을 달기로 했다. 원목 테이블을 놓을 거지만 일하는 공간과 먹는 공간이 다시 한번 분리되었으면 해서 부엌 상판과 이어지는 아일랜드 식탁을 놓기로 했다.

그리고 부엌 옆으로는 다용도실을 만들어 세탁기를 설치할 곳을 만들었다. 다용도실은 발리의 일반 렌트 빌라에는 잘 없는 공간이다. 세탁기를 놓고 남는 공간에는 나무 선반을 설치해 팬트리로 사용해야지 싶었다.

일층과 이층을 이어 주는 계단 밑 공간은 문을 달아 수납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고 계단은 개방감이 느껴지도록 손잡이는 생략해 달라고 했다.

이층은 따로 공간을 나누지 않았다. 침실과 거실이 혼합된 스타일이었는데 소파에 앉아서도, 침대에 누워서도 볼 수 있도록 큰 텔레비전을 달아야지 생각했다. 철저히 쉼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침대 뒤편으로는 드레스 룸을 만들었다. 드레스 룸 역시 열린 공간인데 곰팡이 집에서 크게 데인 나는 옷에 곰팡이가 생기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공기 순환이 잘 되도록 문이 있는 장농 보다는 옷을 걸 수 있는 행어를 짜고 모든 옷을 다 걸어 놓은 생각이었다.

나는 집에 있으면 야외 생활을 잘 안 하기 때문에 바깥 정원 자리는 최대한 효율적인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수영장을 놓을까 생각도 했지만 생각보다 수영장 사용 빈도가 낮고 매달 관리비도 들어가니 굳이 있을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수영장이 가까이에 있으면 각종 벌레가 많아지고 집이 습해진다. 집이 습해지는 것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거실 통창으로 푸릇한 식물들이 보이면 좋을 것 같아 한쪽에는 잔디를 깔고 발리 나무인 Jepun을 한그루 심어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남는 공간엔 나무 데크를 깔고 작은 테이블도 놔야지 싶었다. 날이 선선해지는 건기에는 이곳에서 고기를 구워 먹거나 커피를 마시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자투리 남는 공간에는 서핑 보드를 보관할 수 있는 곳을 만들기로 했다. 이곳은 스쿠버 다이빙을 다녀와서 장비를 말리는 공간으로도 사용하면 좋을 것 같았다.

자료를 정리하고 나니 마치 첫 출발선의 선 마라토너 처럼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요잇 땅! 이제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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