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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강 작가의 독일삶 Sep 28. 2017

 테왁에 대한 단상

제주의 내음을 풍기다

                         

 이국땅에 살고 있는 나는, 고국의 반가운 소식만 들어도 마치 순식간에 유체이탈이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한걸음에 그곳을 향한다.


2016년 11월에 제주 해녀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소식에 맨 먼저 떠오른 이가 바로 제주토박이 김정배 작가였다.

제주 서귀포에서 태어나 제주의 기운을 한껏 품고 가슴 따스한 동화를 쓰는 작가. 그가 이번에 ‘할머니의 테왁’이란 책으로 어린이 독자들의 심장을 두드렸다.


 처음에 ‘테왁’이라는 용어가 생소했다. 외래어 같다는 생각을 하며 펼쳐든 문장 속에서 해녀들이 사용하는 도구,라는 것을 찾아냈다. 미지의 단어를 발견한 기분은 이런 것일까?


언젠가 독일 베를린에 있는 페라가몬 박물관에서, 요르단에서 발굴된 ‘무샤타 궁전’을 처음 보았을 때다. 요르단 왕이 별궁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암살되고, 미완성인 상태로 지진이 나 천 년의 시간을 사막 속에 잠겨 있던 비밀의 궁전.

긴 세월 동안 궁전의 형체가 소실되지 않고 보존되었던 이유는 건조한 사막과 적절한 바람이 부식을 막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문득 내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은, 당시 지진과 함께 침몰되었던 수많은 영혼들의 숨소리가 세월의 풍화작용을 거뜬히 이기도록 돕지 않았을까. 였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사막에서 깨어나 첫 숨을 들이킨 궁전은, 수많은 후대들의 물음에도 그저 침묵한 채 현대의 역사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 유적을 처음 발굴한 독일 고고학자는 분명 ‘유레카’라고 외쳤을 것이다. 천 년의 시간 속으로 태엽을 돌려 돌아가보는 재미가 쏠쏠했을 것이다.

나 또한 테왁,이라는 단어에서 그럼 숨 떨리는 감흥을 느꼈다. 작가는 글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해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은 박물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유난히 박물관을 사랑하는 나에게 작가의 말은 실감나는 표현이었다. 무엇보다 천 년의 사라짐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주 끈끈하게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일었다.

김정배 작가는 제주에서 태어나 지금도 제주의 땅을 밟고 살기에 더더욱 제주에 대한 뜨거운 애틋함을 가질 것이다. 그녀의 소중한 바람이 책 속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해녀, 그리고 그 해녀가 분신처럼 지니는 테왁은 우리에게 박물관과 다름 없다. 나는, 작가가 독자들이 글쓴이의 의도를 보물찾기처럼 찾아내길 원하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썼다고 자부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소중한 박물관을 다시는 천 년의 사막 속으로 침몰하지 않도록 돕는 일이기도 했다.


 <할머니의 테왁> 안에는 아기자기한 일곱 편의 글들로 꾸며져 있다. 작가의 말대로 누구나 들어와서 편히 쉬어도 좋을 작품들이다. 그가 만들어낸 소담스런 글집은 눕기에도 편안하고 정갈하다. 현대의 삶에 지쳐있는 사람은 누구나 마음껏 쉬어가도 좋을 것 같다. 글집 안에는 여러 개의 방처럼 꾸민 아기자기한 글들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할머니의 테왁>, <쇠돌이와 서 판관>, <릴레이 공부, 꽃길>, <은지의 특별한 여름방학>, <아기별 들레>, <검정꼬리 강아지별>이 일곱 가지 무지개처럼 제각각 다양한 색깔로 자신만의 독특한 방으로 꾸미고 있다.

- “내 꿈은 발명가야. 나는 눈이 앞 뒤에 달려 있지. 발명가가 되려면 모든 것을 잘 관찰해야 하기 때문이야”(은지의 특별한 여름방학 中)

- “아무 필요도 없을 것 같았던 내가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데 꼭 필요한 존재라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어요”(검정꼬리의 강아지별 中)


 특히 7개의 작품 중에 흥미롭게 읽었던 것은 <쇠돌이와 서 판관>이다. 이 작품은 뱀굿에 누나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안 쇠돌이가, 지혜와 용기를 내어 서 판관과 함께 악습을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이와 유사한 전래동화가 더러 있지만, 작가적 감성으로 스토리를 감칠맛나게 엮어낸, 흥미진진하고 현장감 있는 작품으로 자신있게 추천하고 싶다.

예로부터 섬지방에는 바다를 두려워하는 민초들이 희생제물로 소녀들을 바친 이야기들이 많다. 실제로 <쇠돌이와 서 판관>은 사라지는 이야기 속에서 휩쓸리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지금도 김녕 뱀굴 입구에 ‘서련판관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시간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남김과 기록의 노력이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김정배 작가의 글은 소중한 가치를 가진다.

 작가는 친절하게도 <할머니의 테왁>을 제주어로 써서 책의 말미에 꼼꼼하게 부록처럼 챙겼다. 중요 단어들을 얽어매어 이해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낯설기만 한 제주어. 하지만 지방마다 독특한 언어가 있다는 것은 동화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지역사 고찰에도 의미가 크다. 즉 사라져가는 방언들을 보존하는 것은 문화 복원의 적극적 통찰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열두 살인 딸은 내가 읽어준 제주어로 된 <할머니의 테왁>을 듣고는 마치 노래소리 같다고 했다. 아니, 바람 같다고 했다. 나는 그저 허허, 웃었다. 제주에는 바람, 돌, 여인이 많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바람이 많아 제주의 언어도 바람소리를 닮았나 보다, 생각을 했다.

작품을 감상하는 내내 작가의 마음이 제주의 바람과 함께 살포시 실려왔다. 그 바람은 너울너울 춤을 추며 태평양으로, 대서양으로 날아갈 듯하다.

그의 글운을 기리며, 알싸한 가을바람 마시러 길을 나섰다. 제주의 바람처럼 짠 내음이 미간을 스친다. 진짜 유체이탈이라도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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