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식품은 미래를 꿈꾸게 한다
30대까지는 한국에서, 이후 지금까지는 독일에서 살고 있다. 벌써 독일에서 산 시간이 한국의 절반에 도달했다. 이제 여기서 더 산다면 머잖아 한국의 세월을 앞지르게 되겠지. 그럴수록 이상하리만치 독일에 대한 적응감정은 되려 쇠퇴하고 있다. 늘 고국을 꿈꾸는 이유다. 인생을 하나의 둥근 원으로 비유하자면 삶의 끝으로 치닿을수록 시작점에 도달한다. 그래서인지 나이들수록 유년의 기억이 또렷해지는 법이다.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그럼에도 내가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독일을 사랑하고자 가끔 한국과 닮은 점이 있을까 묻곤 한다. 그래야 어떤 공통분모 속에서 친화력을 가질 수 있으니까. 그래, 가장 큰 닮은 꼴은 역사적으로 두 나라 모두 분단의 역사를 경험했다. 라인강의 기적처럼 우리에겐 한강의 그것이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닮은 꼴이 있다. 두 나라는 내일을 사랑하는 민족이다.
이 무슨 귀신 쌀겨 까먹는 소리냐고?
직관적인 음식문화를 살펴보면 말이다. 두 나라 모두 저장음식이 발달해 있다.
저장식품이라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만나나 메추라기 같은 일회성이 아니다. 저장식품을 만든다는 것은 내일을 꿈꾸기에 가능한 것이다. 내일 죽을 사람은 나를 위해 마늘장아찌를 담지 않는다.
최근 종영된 한국 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인 이해숙(김혜자 분)이 목을 매달아 죽으려는 동네 할아버지의 집에 가서 찰옥수수 두 개를 건넨다.
"이거 하나는 오늘 먹고, 하나는 내일 드셔"
할아버지는 찰옥수수의 따뜻함에 그만 목이 매인다. 주는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내일 옥수수를 먹고 죽어야 한다. 그러다보면 하루가 살아지고, 내일이 오는 것이기에 살려보겠다는 해숙의 지혜가 엿보인다. 내일을 꿈꾸게 하는 데 음식은 주효하다. 빈말 같아도 '언제 밥 한 번 먹자'라고 하는 인사는 미래에 대한 신실한 예의다. 우리 사이에 미래가 있다는 의미다.
우리 민족은 겨울이면 김장김치를 담아 땅에 묻었다. 겨우내 살 궁리를 해놓은 셈이다. 시골의 경우, 고구마를 수확해 방 구석에 공간을 만들어 쌓아두고 헐벗은 이웃과 함께 했다. 짜쪼름한 젓갈을 담궈, 노인의 달아나버린 입맛을 돋우었다.
독일에 사는 한인들에게 깻잎씨는 문익점의 목화씨만큼이나 귀하다. 살림하는 한인들 뿐만 아니라 홀홀단신 유학생들 조차 어디서 공수했는지, 베란다 공간 화분에 작은 텃밭을 일군다.
작물재배에는 한 톨의 재능도 없는 나도 깻잎 모종을 심었다. 한인 어르신이 업어다준 준 시들어가는 깻잎을 으라차차 살려내었다. 이게 생각보다 밥도둑 효자다. 요즘 아침에 빵 위에 버터를 바르고 그 위에 한 장 두 장 얹어먹는 재미에 빠졌다. 장아찌 만들 정도의 양은 아니지만, 깻잎의 향취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향수병이 치료된다.
독일인들에겐 우리의 김치와 비슷한 자우어크라우트가 있다. 양배추 발효음식이다. 소시지도 그야말로 전천후 저장식품이다. 와인과 식초류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모름지기 장아찌 등 저장식품은 내일을 꿈꾸는 음식이다. 우리는 사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들이지만, 그럼에도 내일을 기대하니까 미리 음식도 만들고 준비한다. 처연하지만 그래야만 힘을 낸다.
최근 친하게 지내는 독일인 집에 초대를 받았다.
그들 부부는 잔병치레 하나 없이 건강하게 노후의 첫 발을 내딛고 있었다. 내 나이보다 스무살이나 위인 안주인은 골골인 나보다 건강한 팔뚝이며, 꿀벅지가 탐이 날 정도였다. 그는 나에게 건강비법이라며, 자신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쉿'하고 소리를 낸다. 도대체 무슨 비밀이길래, 저리 경건의 어조일까 궁금해졌다. 진시황의 불로초나, 상어지느러미 등 특제상품이라도 숨겨놓은 것일까? 그는 뜸을 들이며 잠시 후에 대령하겠다고 말했다.
자잘한 수다가 끝나자 안주인의 식탁이 펼쳐졌다. 그윽한 소스가 일품인 돼지고기 훈제요리가 입가에 흐르는 침을 비웃고 있었다. 어찌나 맛있는지, 나는 게 눈 감추듯 돼지의 속살을 우걱우걱 씹고 목구멍으로 꿀꺽 집어넣었다
그러는 사이 나의 배는 삼겹살이 오겹살이 되어 있었다. 잠시 후 안주인은 소주를 담을 것 같은 앙증맞은 잔에 희뿌연 액체를 담아 내왔다.
"이게 바로 나의 건강비법이지."
처음에 보드카나 화이트 와인인가 싶었다. 나의 궁금증을 살살 긁던 그녀가 원샷,하라고 한다. 또 나는 시키는대로 하는 지고지순형이다. 독약이라 할지라도 그녀가 먹으라면 홀짝 했을 법 하다. 지난 번 해보라고 한 ABC 주스도 아침마다 하고 있는 모범생이다.
오, 그런데 말이다. 달짝시큼한 맛이 위를 타고 내려가는 폼이 그윽하다. 오장육부를 질서정리 해주는 느낌이었다.
"어머, 맛나요. 이게 뭐죠?"
"바로 사과식초!"
그 흔한 사과로 만든 식초라고?
문득 오래 전 시어머니가 만들어주신 감식초와 사과식초가 생각났다. 막 시집온 새댁이었던 난, 시큼하고 이상해서 먹지도 못하고 오래 놔두었다 버렸던 기억도 있다. 지금 생각하니 죄송하네.
"어, 근데 달콤하네요? 어떻게 만들어요?"
"아주 간단해. 이거 소화에도 얼마나 좋은데."
그녀의 레시피는 간단했다.
1. 사과를 껍질 벗겨 가늘게 썬다.
2. 소독된 유리병에 물을 적당하게 넣고 설탕도 적당히 넣는다.
3. 껑 열고 천 보자기로 덮어놓고 날마다 나무 젓가락으로 저어준다.
4. 2주 정도 실온에 둔다. 끝!
헉, 이게 레시피라고? 도대체 요리저울은 왜 있는 건데?
적당히, 라는 단어는 옛 종가집 어른들이
잔뜩 뻐기며 말하는,
선천적 손맛에서나 가능한 소리 아닌가?
그런데 곰손인 나에게도 적당히는 통했나 보다. 나 또한 적당한 양으로 만들어 보관했더니 비스므레한 맛이 났다. 사실 그 옛날 곰아가씨가 사람이 되려고 마늘과 쑥 먹고 100일이나 기다렸는데 2주는 거뜬하다 생각했건만 조금 인내심이 요구되었다. 매일 천보자기를 열어보고 사람이 되었는지 확인하게 된다.
덕분에 요즘 우리 가족은 고기를 먹은 후 사과식초를 입가심으로 마신다. 오늘만에 집중하며 살아가려고 작정했던 내가 미래를 꿈꾼다.
갈수록 자연이나 일상의 소소함이 스승이 될 때가 많다. 모두 앞으로 죽은 시신이 될 몸이지만, 그럼에도 이어령 선생님의 말처럼 인생은 탄생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그래서 자연과 가까울수록 육체의 요구는 더 밝아지고 선명해진다.
노부부가 정성스레 가꾼 정원과 주변을 산책하며, 그들 부부는 기울어가는 생을 사는 것 같지만, 어쩌면 자기만의 무늬를 만들어가며 미래를 꿈꾸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땐가 사과식초를 못 만드는 날이 올지 모른다. 그때는 겸허하게 내가 애초에 있던 자연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구나, 생각하면 된다. 죽음이 계절처럼 오고 있는 것을 그저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P.s
중년의 언덕을 지나다보니
건강에 참 신경쓰게 됩니다.
이제는 내 몸을 신경써야 하는
여러 이유들이 생긴 것이겠죠.
사과식초 참 좋아요.
독자 여러분들도 만들어드세요.
천연 위장약입니다. 하하~~~
다음에는 마늘장아찌를 한 번 만들어볼까요?
이렇게 저장식품 만들고
미래를 꿈꾸다 보면 하루하루 더 살아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