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말글아 로 Oct 26. 2020

부치지 못한 태교 편지 11

2015. 6. 18.   -아빠 목소리

2015년 6월 18일

-아빠 목소리     


오늘 아침 임신테스트기를 다시 해보았어. 

5분 안에 나타나는 흐릿한 선. 그리고 이틀 전 보다 좀 더 진해진 선. 

‘진짜 임신인가 봐.’

형규가 나를 꼭 안아주며 임신 축하한다고 말해주었어.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 둘이서 다 이겨낼 수 있어. 내가 더 잘할게.”라고 말했어. 

네 아빠가 말이야. 진짜 멋있지.


어제 편지에서 '엄마가 아프지만 힘을 내기 시작한 때'는 아마도 네 아빠 목소리를 들은 후부터 인가 봐.     

아주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지. 그건 내일 얘기해줄게.

사실 지금 네 아빠 형규가 날 기다리고 있거든. 

우린 저녁으로 고기를 먹으러 갈 거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고기 말이야.          


2015. 6. 19.

-꾀병     


어제 해 주려던 얘길 해줄게. 

네 아빠 형규가 노량진에 올라와서 임용고시 준비를 할 때였어.

사실 지금 와서 말해주면 형규는 굳이 서울까지 올라와서 노량진에 고시원에 들어가 임용고시를 준비하지 않아도 됐었어. 그냥 부산에서 엄마 밥 먹으면서 도서관에 다니며 공부해도 됐었지. 

그런데 서울에서 그림 그리며 혼자 살던 나는 형규가 많이 보고 싶었고 물론 형규도 마찬가지 여서 공부 핑계 대며 서울로 슬쩍 올라왔지. 네 할머니에겐 비밀이야.


형규는 노량진 고시원에서 공부를 했어. 

난 노량진에서 버스를 타면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낙성대에서 혼자 살았어. 노량진에 있는 형규가 보고 싶어서 자주 가고 싶었지만 공부하는 형규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늘 참고 참았지. 하지만 거의 2~3일에 한 번은 만난 것 같아.

형규가 찾아오기도 하고, 내가 가기도 하고.

우리는 그때 가장 아프고, 가장 연약한 연인이었어. 고시생과 무명 화가의 사랑이라니.


그런데 어느 날 내가 형규에게 과일을 좀 가져다주러 노량진에 갔어. 우린 같이 밥을 먹었지. (노량진 학원가에 뚝배기 집이 있었는데 거기 계란찜과 순두부 뚝배기는 정말 맛이 좋았어. 근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지. 엄청 장사가 잘됐는데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몰라.) 아무튼 거기서 밥을 먹고 645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려는데 말이야, 내 배가 살살 아파오는 거야. 형규가 등을 두드려 주기도 했지만 너무 아팠어. 집에 가서 혼자 토하고 뒹굴고 할 것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지. 형규도 걱정이 많이 됐는지 어찌할 줄을 몰랐어. 그 사이에 버스가 도착하고 나는 괜찮다며 올라탔지. 그리고 좀 뒤에 형규도 버스에 올라탔어. 혼자 집에 보내기가 걱정된다고. 


그런데 말이야. 참 이상했어. 

한순간에 배가 하나도 안 아픈 거야. 정말 거짓말 같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 

난 무슨 꾀병을 부린 아이가 된 것 같았지. 형규는 내 말을 믿어주었어. 

그리고 이렇게 말했지. “네가 날 정말 사랑하나 보다.”라고.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한 번씩 해. 

나를 놀리며, 서로 웃으며.   


나중에 네가 유치원이나 학교에 가기 싫어서 배가 너무 아파하면 그땐 꼭 한 번은 믿어줄게. 

꼭 한번 만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줄게. “네가 엄마를 정말 사랑하나 보다.”라고.


이전 10화 부치지 못한 태교 편지 10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