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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G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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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레인 Apr 04. 2023

기대를 저버린 아들딸들에게

영혼의 숲#6

 "다 큰 놈이... "

" 네 엄마 아직도 돈 벌러 다니는 거 안 보이냐?!"


아버지는 기어코 나의 가슴을 후벼 팠다.


스물아홉, 사법시험을 보겠다며 고시원에 들어온 지 삼 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로부터 며칠간

고시원과 독서실을 왔다 갔다 했다.

정말 왔다 갔다만.


책에 쓰인 글자가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나와는 맞지도 않는 법공부를 그만두겠노라고 결심했다.


일찌감치 1차에 합격했을 땐 신분상승이 앞이라 생각했었지...


사실 아버지 말이 결정적인 계기는 아니었다. 공부가 안된 건 오래된 일이었다.


독서실에 앉아 맹목적으로 줄을 긋고 있다 보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합격 가능성 제로. 그래, 그만둔다니 좀 창피하긴 하지만 아쉬울 건 없다.


지긋지긋한 불안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 뭐 밖에 나와도 크게 달라질 건 없겠지만 일단 이곳을 나가야 한다. 적어도 빛을 쏘이면 나에게 달라붙은 이 칙칙한 우울함이 살균 소독이 좀 되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도망치듯 고시촌을 나왔다.







그때를 떠올린 건 방금 전 아버지와의 통화 때문이었다.


"날도 좋은데 어머니랑 맛있는 것도 사 드시고 하세요."


좋게 건넨 말에 이어진 아버지의 시큰둥한 대답


"돈이 있냐?!"


...


목에 굵은 생선가시가 걸린 것 같다.



6/11(토) 10:00


유난히 눈에 밟히는 여드름 자국을 무시하려 모자를 눌러썼다.


내 피부가 이런 건, 고시의 흔적이다. 스트레스로 인해 생겼던 여드름은 공부를 그만두니 더 이상 나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파인 여드름 자국은 지워지지 않는 영광의 상처로 남았다.


직장을 다니고 밥벌이는 하니까 그나마 다행이지. 하지만 부모님을 생각하면 여전히 쪼그라드는 마음을 어쩔 수 없다.


'떵떵거리며 효도하고 싶은데... 난 왜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걸까?'




가족은 너에게 어떠한 요구도 할 권리가 없어.
너 자신도 스스로에게 기대할 권리가 없지.



몇 발자국 더 가지 않아

G. 의 목소리가 들렸다.


요구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래 맞아.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네 영혼에게 더 이상 다그치지 말라고.


그 지긋지긋한 굴레를

언제쯤 떨쳐낼 거야?


말해줬잖아.

욕망을 포기하지 말고

이해해 보라고.


~하고 싶다. 갖고 싶다.라고만 하지 말고 그것이 누구의 욕망인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욕망 자체에 관심을 기울여보란 말이야.


그러고 보니 욕망에 대해 꽤 많은 이야길 나눴던 것 같은데 여전히 나는 진전이 없다.


자책할 필요는 없어. 원래 욕망이 그렇거든. 너 스스로 그 정체를 알아낼 때까지 그것은 너에게 늘 상처를 입힐 거야.


너는 유명해지고 싶다고 하면서도

조용히 살기를 원하지.


이 두 욕망이 너에게 동시에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면 문제 될 것이 없어. 사실 너는 불가능한 것을 원하는 거야. 그런 욕망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사실 욕망을 가질지 말지는 너에게 달려있는 게 아냐. 생각은 그저 떠오르지. 떠올랐다는 것에는 신비한 힘이 있어. 그 진실이 무엇인지 찾아봐.


욕망도 바라봄의 대상,

그저 측은하게 바라봄의 대상.


그래 돈을 벌고 싶구나.

유명해지고 싶구나.


그건 신으로서의 나인가.

에고의 나인가.


'아, 지금 내가 무슨 질문을 하는 거지?'


생각을 하는 찰나

눈앞에 빨간 의자가 나타났다.


G. 를 처음 만난 날,

숲에서 보았던 그 의자다.


나도 모르게 몸을 움직여 의자로 갔다.

앉아서 눈을 감았다.


고요하게

빛을 쪼이며

스르르...


내 안에서 생각인지 기도인지 모를 언어가 흘러나왔다.


은 이미 풍요로우며 이미 모든 것이다.


세상을 경험하고 싶은 신의 마음으로 그저 그것을 경험하자. 경험하는 수밖에 나는 도리가 없다. 도망칠 수도 포기할 수도 없으니.... 더 이상 이것이 나를 찢어놓지 않도록 그저 에고의 욕망을 바라보자.


그래. 욕망은 분리감에서 오는 두려움, 그 속에서 외치는 아우성. 신의 아들로서 이미 다 가진 내가 그렇지 않다는 설정을 해놓고 써 내려가는 드라마. 그렇다면 멋지게 가져주마.라고 하지도 말자. 그건 욕망의 노예가 되겠다는 발언. 그냥 그 드라마를 지켜봐 주자. 경험해 주자. 애쓰지 말고 그저 바라본다. 욕망이라는 그것을......... 아 내가 욕망하고 있구나. 그래. 토닥토닥.


나라는 경계, 내 인생, 내 집, 내 돈... 나의 것은 없지만 동시에 모든 것은 나의 것. 그저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풍요롭게 하리란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마저도 욕망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마음과 생각과 느낌을 잠재우고 가슴에게 귀를 기울입니다.


나의 신이 나의 가슴이 나의 욕망을 도구로 마음껏 경험하시기를. 마음도 생각도 느낌도 욕망도 모두 도구로서 가슴의 명령에 복종할 것입니다. 이미지도 정체성도 나라는 허구도 이 몸도 모두가 거짓이기에 집착을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집착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그저 바라봅니다. 그저 가슴을 열고 경험하고 관찰할 뿐입니다. 그렇게 살아가게 하소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시 나였다.


나는 진실에 다가간 것일까? 진실은 의지로 있는 없다는 건가? 의지는 없고 신의 의지만 있을 뿐이란 건가? 그럼 욕망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건가?


기분이 좋진 않지만

고통스럽진 않다.

마음이 한결 가볍다.


순간 자유를 느꼈다.

그것이 이루어지든, 아니든

어차피 내 뜻이 아니라면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면...


그래 그것은 차라리 가볍다.



G. 의 목소리가 들렸다.


클로닌, 모든 것은 텅 비어 있어. 너는 그저 투명함이지. 너의 관념, 생각, 욕망들도 그저 투명한 허상일 뿐이야. 신의 의지는 모든 것을 뚫고 지나가. 그저 신의 의지가 일할 뿐이야. 될 일이 되는 것뿐이라고. 그러니 굳이 너는 고통을 받을 필요가 없어. 생각도 욕망도 계속해서 가질 테지만, 사실 가질 필요가 없는 거야. 어차피 신의 뜻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므로.


그래, 저항은 고통일 뿐이다. 계산하고 어떻게 바꾸려 해 봤자 결코 신의 뜻을 거를 수는 없다. 그러므로 굳이 저항하느라 애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저 투명한 나를 받아들이는 게 상책이다. 온전히 내맡긴다는 것은 그래, 온전히 내 맡긴다는 것은....... 내맡기지 않아 봤자 어쩔 도리가 없으므로............... 그래 온전히 내맡겨보자.


너는 그저 투명하다는 것 그것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감사해 봐. 신이 그리는 삶의 예술을 즐겨봐.  신은 너의 몸을 통해 삶이라는 예술을 공연하고 계시지.


마음을 고요히. 어차피 신의 뜻이라면 그저 조용히. 편안히. 고통받을 필요가 없다. 그저 나는 질문할 뿐이다. 진실은 무엇인지.






숲을 내려와 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보내지 못할 글자를 내 눈에만 보이도록 적어 내려갔다.


...

미래를 이상화하다 지쳐

꿈을 버리고 싶어질 때쯤

꿈은 저 멀리가 아닌 지금임을 알았어요. 꿈이 잘못은 아니었어요. 욕망이 잘못은 아니었어요. 그것을 바라보는 내 문제였죠.


그러니 사랑하는 아버지.

제가 다시 생각할 수 있게끔 계속 이야기해 주세요.


돈이 없다.

먹고살기 힘들다.

돈이 제일 중요하다.


그래요. 당신이 말씀하실 다시 알게 돼요.

아, 내가 여전히 부족함을 느끼고 있구나.

집착하고 있구나.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때쯤이면

가슴 아프지 않겠죠.


아마도 저 자신이기도 한 아빠에게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도 않을 거예요.

인간은 타인을 통해 자신을 경험할 뿐이니까요.


마지막 남은 하나의 고통에 감사해요.

이것 덕분에 계속해서 저를 찾아보고 있어요.


진정으로 자유로워진 그날,

고통도 없어지겠죠.


기대를 저버려서 죄송해요.

저만 행복하려 해서 미안해요.

아버지,

우리 같이 행복해져요.


사랑합니다.


눈물이 쏟아졌고

홀가분해졌다.


...

여전히 욕망한다.

하지만 뭔가 달라졌다.


끈덕진 집착이 조금은 떨어져나간 기분.

적절한 단어는 모르겠지만,

그래.. 일단은

여유라 해두자.


여유가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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