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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레인 Oct 23. 2023

가장 싼 메뉴를 고른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chapter 1. 관계

episode 8. 박이철과 김은영(남편과 아내)


가장 싼 메뉴를 고른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두 번째로 고른 음식이

하필 이 집에서 자랑하는 대표 메뉴가 아니라는 것도

남편의 심기를 건드렸다.


자꾸만 어긋나던 분위기는

남편과 아내의 가장 불편한 부분이 만나는 지점

'은영의 일 이야기'가 나오면서 극에 달했고,


결국 아내는 기어코 남편의 입을 통해

듣기 싫은 그 말을 듣고 말았다.


'당신은 허위의식 가득한 욕심쟁이야.'


욕심쟁이.

은영의 꿈이 다시 또 욕심으로 치부되어 밟히고 있다.


여러 번 겪은 일이라 수차례 비우고 단련했어도...


감정은 관점에 의해 발생하며

상대의 말은 자신 안의 외면한 부분이 투사된 것임을 머리로는 알았어도...


은영은 여전히 덜덜 떨리는 두려움을 보았다.


그래, 일이야기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자.

우리 이미 여러 번 싸웠잖아.


내키지 않는 밥을 간신히 넘긴 후

이철과 은영은 거리를 둔 채 떨어져 식당을 나왔다.


'내가 너무 심했나'

 

아내는 특유의 침착함을 내보였지만

서운함이 가시지 않는 눈치였다.

분명 싸우기 싫고 상처주기도 싫은데...

남편의 입에서는 이번에도 차가운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띠리리링~


때마침 이철에게 걸려온 전화를 틈타

은영은 식당 앞 공원 놀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편이 밉지는 않았다.

그저 가슴이 답답했다.


이철은 다정했지만 '아닌 건 아닌' 사람이었다.

착한 은영 역시 누가 뭐래도 쉬 바뀌지 않는 고집이 있었다.


부부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바닥과 하늘을 번갈아 보았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지만 생각보다 깊은 골에 서로를 바라볼 수 없었다.

반쯤 풀어지려던 마음에 다시 매듭이 생기고 그러다 또 엉키고..

결국 둘은 더 무거워진 실타래를 안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출장을 가야 하는 남편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나는 좀 걷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은영은 일단 꾹 참고, 차에 타기로 했다.


'그냥 혼자 보낼걸.'


집에 가는 10분 동안,

은영의 실타래는 더욱 꼬이고 있었다.


"책 보고, 글 쓰고.. 주변에 누가 그러고 있는 사람 있어?"

그것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 당신만 그렇게 현실적이지 않다고."


남편은 마치 작정을 한 사람 같다..


"출장 잘 다녀와~

나는 산책을 좀 해야겠어."


차에서 내린 은영은

곧바로 주차장 밖으로 향했다.

괜찮은 척 편하게 보내주면 좋겠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올라오지도 않고 바로 갈 거야?"


"응... 잘 다녀와."


햇살은 아무렇지 않게 밝았다.


숲에 어울리지 않는 복장으로

익숙한 숲길을 걸어

은영은 익숙한 자리에 멍하니 앉아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띠링~


남편은 잘 출발했나 보다.

한참 후 찍히는 단골 커피숍 쿠폰이 반갑다.


'그래도 내 번호로 찍었네.'


연락을 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서운함이 커서 마음이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




누구나 태어나면서

인생에서 풀어야 할 숙제를 받는다는데,


가장 큰 그림자.

아마도 지구별에 오기 전 꼭 풀어보기로 했던 과제가

은영에겐 '일'이었던 것 같다.


단순히 일적인 성공이 아니라

자신 안의 안 될 거라는 목소리들을 이겨내고

가장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용기


남편이 그녀에게 보여준 말들은

자신 안의 그림자라는 걸,

은영은 알고 있었다.


보지 않으려 숨겨둔 자기 안의 수치심.


'이번이 숙제를 풀어볼 좋은 기회야.'


생각이 미치고 잠시 후

마음이 외치기 시작했다.

때마침 공원엔 아무도 없었고

은영은 충분히 느끼려 가슴에 귀를 기울였다.


넌 욕심쟁이야.

네가 자격이 있니?

돈 벌 자격이 있어?


네가 하는 그런 이야기에 사람들이 돈을 지불한다고?

넌 그냥 대충 주워들은 이야기를 나불거리는 아줌마야.

그래서 네가 이룬 게 구체적으로 뭔데?

내면의 이야기, 너만의 진리 같은 게

표현할 수 있는 거라 생각해?


아직도 넌 욕심쟁이야.

깨달은 척 숭고한 척 그만하라고

다 사느라 힘들어. 먹고사느라 모두 애쓰고 있다고.

고상하게 사랑타령할 시간이 있어? 눈감으면 코베 가는 세상이야.


현실감각이 없어. 책 읽고 글 쓰고나 하지 말고 현실감을 좀 가지라고. 네가 뭔데 도움을 준다고 청승이야. 그냥 조용히 있어. 신의 통로? 사명? 웃기고 있네. 너처럼 돕겠다는 사람들 사람들 우스워.



어느 정도는 진짜로 들었던 말들이었고

어떤 표현은 자신도 모르게 쏟아져 나온 말이었다.


그래. 이게 나야. 나의 마음이야.

은영의 눈에 눈물이 쏟아졌다.

아프지만 묘한 시원함을 느꼈다.


죽을 때까지 성장하고 꿈꾸고 싶다는 바람이

더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돕고 싶다는 바람이

언제부턴가 내 주변에선 우스운 가십거리가 되었지.


"당신은, 언니는, 은영 씨는

현실 감각이 없어. 팔자 좋아. 독기가 없어.

헛똑똑이었어."


아니 나는 행복해졌는데?

편안해졌는데?


자기 발견, 자기완성, 자기실현이야말로

내가 추구하는 그것이야말로

결국 모두가 가야 할 길이고

나는 그 길을 착실히 걸어가고 있는데?


나는 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잘하고 있는데...


맙소사.

깊은 자신에겐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가장 먼저 그녀는

'나는 돈을 벌 자격이 없다'는 신념을 발견했다.

그것은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나친 자기 검열과 열등감이었다.


그래, 성공이 두렵지?

네가 꿈을 이룰 자격이 있어?

그래. 그게 너지.

자신감도 없고 독기도 없어.

좋아하는 일만 해서 되지 않아.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만약에 잘되면 그건 또 어떻게 감당할 거야?

신경 쓸 일도 신경 쓸 사람도 많아질 텐데

가족들이 진심으로 좋아해 줄까?

사실은 너도 그런 걸 원하진 않잖아.

헛된 꿈 갖지 말고

그냥 살던 대로 살아.


두려움을 안는다.

다시 나는 사랑이란 걸 안다.

사랑은 두려움을 품는다.


나를 안다는 건 그림자까지 아는 것이다.

은영은 가장 큰 숙제를 풀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마음속 떨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그 아이를 안고서,

말해주었다.


내가 여기에 있어.

고통을 겪고서 이제 단단해진 내가

이래도 모르겠니?


넌 이미 사랑이야.

그러니 원할 필요도 없어.

네가 그것이야.

이미 여기에 있어.


현실에서 나타나기를 기다릴 뿐

그건 이곳에 있어.


내 말이 진실로 진심에서 들릴 때까지

두려움을 품고

당연하게, 대수롭지 않게


원하는 그대로 살아갈 자격이 있어.

너에게 주어진 권리를

풍요와 사랑을

가슴을 열고 당당히 받아들여야 해.


어떻게 그녀 자신이 이런 말을 한지 모르겠다.

아니 그건 어디선가 들리는 말을 그저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그녀의 마음은 한결 따뜻하고 가벼워졌다.

비워진 가슴으로 서서히...

남편을 향한 깊은 감사와 사랑이 채워졌다.


'마음을 보게 해줘서 고마워.'




부정적인 상황은 늘 이렇게

치유의 기회를 준다.


그냥 긍정적으로 살면 되면 되는 거지

굳이 들여다보고

정화를 하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그랬던 은영이었지만

이제는 먼저 비워야 함을 안다.


띠리리링~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은영의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네, 여기 00 출판사인데요. 김은영 작가님이신가요? 작가님 요즘에 올리신 글을 보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기분 좋은 예감.


마음을 돌봐 준 후에는 늘

좋은 일이 생기곤 했다.


빙빙 돌아 오래 걸리는 듯해도

그래야만 했고 그랬어야 한다는 걸

이제는 그녀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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