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하던 일은 마무리를 해줘야 예의일 것 같아서,아니 그보다는 어설프게 끝내는 게 영 불편해서하루 미루고, 일주일 미루고, 보름을 미루다 보니결국엔 퇴사를 하는 게 아니라 당하게 된 꼴이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은영의 화(火)는 곧장 자신에게로향했다.
한두 번 경험했나?
도대체 일의 끝이 어디에 있다고,
어렵게 매듭을 지어놨으면 됐지,
그걸 또 그대로 넘기지 못하고
넘기는 순간까지 잡고서
끝까지풀어보려고 하고 있냐고.
나도 참 성격이다.
어차피 후임에겐 조금 더 하고 주나 그냥 주나 별 상관 일이었다. 얼마나 해서 주느냐보다 적절한 타이밍에 넘기는 게 모두에게 더 중요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인사를 하고 나왔는지,
어떻게 지하철을 탔는지
어떻게 내려 집까지 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은영은 무슨 맛인지도 모르며 밥을 먹다가
무심히 오늘 있었던 일을 꺼내놓는다.
이야기를 듣던 남편은 반찬을 집다 말고 젓가락을 놓았다.
"당신도 참 성격이야."
남편은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약간화가 난 사람처럼 보이기도했다.
당신은 그렇게 수모를 당하고도 '네에' 하고 온 거야?
그러려니, 그럴 수 있겠거니~ 합리화하면서?
스스로가 불쌍하지도 않아?
내가 진즉 그만두라고 할 때도 진행하던 계약을 마무리해야 한다느니, 하던 프로젝트는 매듭을 지어야 한다느니, 차일피일 남 생각만 하면서 미루더니 그래서 당신 꼴을 봐.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냐고.
당신, 무시당한 거야.
보기 좋게 잘린 거라고!!
...
그렇게 콕 집어서 말 안 해줘도 알아들을 텐데,
가슴이 쿡 막히는 것 같다.
위로해 달라고 징징거리고 싶지도 않고
서운하다며 싸우고 싶지도 않다.
아무런 대꾸 없이 입을 꾹 닫는 걸 남편이 제일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번에도 은영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닫고 속으로만 삭인다.
회사도 남편도...
아무도 몰라줘도
내가 날 알아줘.
일도 사람도 진정성 있게 대했다는 거
딴 사람은 몰라줘도 내가 알아줄 거라고.
...
그렇지만 너무해.
하나라도 더 마무리하려던 내가 무색하게
어쩌면 그렇게도 서둘러 퇴사통보를 할 수 있어?
김은영,
너는 도대체 그래도 상관없는 거야?
네가 불쌍하지도 않아?
도대체 넌 정말 너 자신은 어떻든 좋단 말이야?
너의 몸뚱이는 너의 개성은 어찌해도 좋단 말인가?
왜 그렇게 너를 돌보지 않는 거야?
그저 남보기에 하나라도 더 하는 게 중요한 거야?
그렇게 거울을 보고 서서 울컥하면서도,
한편으로 은영은 심지어 그 순간까지 남들 보기에 좀 더 완벽한 마무리를 위해 고민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좋은 말로 아름답게
내가 계약한 사람들이 최대한 다치지 않게
회사 사람들에게도 멋지게 기억되도록
서운함이 있는 그와 그녀들에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도록
그게 나에게 최고로 편한 걸.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주 가끔,
오기가 발동하는 날이 있다.
고장 난 프린터를 기필코 고치겠다며 밤새 무모한 사투를 벌인다던지, 약속 시간이 다가오는데 안 나가고 끝까지 차고 나갈 시계를 찾는다던지, 누가 봐도 자는 게 나아 보이는데 기필코 졸면서 버티고 앉아 있는다던지....
'중요하지 않은 일에 매달린 완벽주의자'
가장 압권은 인생의 주요 이슈인 수능일에도 발생했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 매달린 완벽주의자는 수능 때도 시간이 부족한 걸 알면서 끝까지 모르는 문제에 매달려있었다. 2교시 수학 첫 장의 마지막 문제였다. 분명 알 것 같은데 답이 바로 안 나왔다. 별표를 치고 넘어가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 줄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고 매달려있는 은영이었다.
은영은 긴장할수록 이성을 잃고,
비합리적 행동임을 알면서도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언닌 분명 성격에 문제가 있어!"
유독 큰 시험을 망치는 언니에게 동생 역시성격이라 했었다.
그러고 보면 고시 공부를 할 때도 그랬다. 지금 당장 이해 못 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 당장 알고 싶다는 강박관념이 강했고 이해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것에 대해서는 찜찜함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학문을 하는 게 아니라 시험 준비를 하는 사람인데, 진도가 느렸다. 요령껏, 효율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디 시험뿐인가?
완벽하지 못하면 못 넘어가는 탓에
결국 마무리짓지 못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이번 퇴사도 그런 성격이 반영된 사건이었다.
완벽한 마무리를 하려다
어설프게 중간에 튕겨져 나와버린...
내가 마무리를 못하면
그렇게 남이 혹은 시간이 마무리를 해준다.
은영은 이번이야말로 자신을 인정하고
바로잡아야 할 때라고 느꼈다.
찬찬히 돌아보니
이기적인 고집이다.
지금 바로 풀지 않으면 못 넘어간다고 우기는 건
말 그대로 고집이다.
지금 당장 풀고 말겠다는 무모한의지는
현재 능력을 고려하지 않은요구였다.
세상에는 지금 당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
때로는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풀리기도 하고
한 바퀴를 돌고 오면 갑자기 이해가 되는 문제도 얼마나 많았던가?
시계가 못 찾으면 핸드폰 시계로 대신하면 된다.
이불을 개지 못하고 나왔으면 돌아와서 정리하면 된다.
약속에 늦지 않고 지각하지 않는 것이 보다 중요한 일이다.
(뭣이 중헌데?)
좋은 모습, 완벽한 모습만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간은 본래 불완전한 존재다.
완벽하려다 마무리를 못하는 것이 수도 없이 많지만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면 완전성을 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이 정도까지.
그래, 그렇게 말해 줄 여유가 없었어.
완벽할 수 없는 나에게
왜 그리 완벽을 요구했을까?
어느 정도까지 하다가 할 수 없다면
마무리하고 넘어가는 도량을 길러야 해.
두 달 후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그때는 너무 미안했다고.
회사 분위기가 너무 심각한 상황이라,
앞 뒤 없이 오해를 했다고.
그때 은영 씨가 너무 고맙고
지금 은영 씨가 너무 필요한데,
다시 와서 일해줄 수 없겠냐는 내용이었다.
잠시 쉬는 동안 은영은 어딘가에 끌려가거나 소속되어 있기보단 주체적으로 서야 할 시기라고 마음을 정했기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알렸다. 회사 사정도 중요하고, 인사팀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지만 무엇이 더 중요한 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완벽하게 좋은 사람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진심을 다한 덕에 이제라도 이렇게 좋은 마무리를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