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제

by 김 경덕

유독 자신들의 性 씨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소싯적에 뛰놀던 남녘 고향땅에서는 창녕 曺 씨, 宋 씨, 盧 씨 등이 그 예이다.

조상들의 공로가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착각 속에 빠져 못난이 행세를 해대는

부류들도 더러 있었다.


일전 만난 손위 동서가 시제에 참석하러 고향인 강릉으로 내려간다고 하였다.

한 번도 시제를 경험해보지 못한 나는 시제의 절차나 규모, 형식 등이 상당히

궁금해 했다.

우리는 명문 집안 축에 들지 못하는 흔하디 흔한 김해 김 가라서 시제를 어디에서

하는지도 몰랐고 거기다가 기독교 집안이라 시제는 멀리서 지켜만 봐야 할 남의

집 행사였다.


초등학교는 등하굣길이 족히 한 시간 이상이나 걸리는 먼 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침에 마을 전체 학생들이 함께 모여 김해 벌판을 가로질러 가다 보면 저 멀리서

시제를 지내기 위해 흰옷을 입고 산에 오르는 사람들을 가끔 볼 수가 있었다.

이 모습이 눈에 들어온 날은 학교에 가서 제대로 수업을 받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시제에 참여(?)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제사에 동참하여 절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제사상 먹거리를 얻어먹기 위해 기필코

올라가야만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아침에 보아 논 시제 장소로 불이

나게 올라간다. 당시에는 군것질할 거리가 참으로 귀했다.

학교 앞 상점에서 파는 것조차 몇 가지밖에 없었다.

물론 우리 같은 까까머리 시골 촌놈들의 호주머니에 돈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제사상 음식들,,,,,,,

떡은 물론이고 내가 가장 좋아하고 먹고 싶어 한 제사상 음식은 생선전이다.

지금 같이 동태전, 민어전 처럼 뼈가 없는 고급 전이 아니고 작은 생선을 적당히 소금 간을

한 후 통째로 밀가루를 묻혀서 솥뚜껑에 지져낸 전이다.

이 중 최고는 두서너 토막 낸 후 노란 치자 물로 화려하게 옷을 입힌 가자미 전이다.

뼈를 발라 먹기도 좋고 생선 살점도 두껍고 풍부하기 때문이다.


시제가 진행되고 있는 묘소 근처에 가면 우리들은 어른 들의 눈치를 보며 주위를 맴돌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우리들을 발견하고 제사 음식 몇 점을 나누어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지금이야 음식 인심이 후하지만 6.25 직 후 어렵던 당시에는 음식 인심이 상당히 박했다.

음식을 나누어 주기는커녕 야단을 치거나 심지어 욕을 하면서 좇아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참을 주변을 맴돌아도 먹거리를 나눠 줄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으면 우리들의 숨겨놓은

비밀 작전이 개시된다.

일제히 주변에 있는 단단한 돌을 하나씩 집어 들고서는 각자 무릎 위에 올려놓은 큰 돌이나

아니면 근처의 박힌 바위돌을 아래로 내려 찍기 시작한다.

그러기를 얼마 동안 하고 있으면 눈치가 빠른 어른들은 쉽게 알아차린다.

다음은 우리가 기대한 그 이상의 성찬이 우리 앞에 찾아온다.

재수가 좋은 날은 따끈한 국밥도 한 그 그릇 얻어 막을 수가 있다.

그런 다음 조용히 우리한테 일러주는 어른 들의 당부의 한 마디

"얘들아! 너네들 참 착하기도 하지?"

"나쁜 녀석들이 이곳 비석이나 상석을 손대면 우리한테 알려줘"

"네"

어느 해였던가?

시제에 올라갔다가 떡고물 한 점도 넣어먹지 못하고 욕만 실컷 얻어먹고 쫓겨난 적이 있었다.

다음 날 하굣길 보복 팀을 조직한 우리들은 전날에 갔던 같은 장소로 다시 올라갔다.

돌로 비석의 글자를 뭉개는 조,

소똥으로 상석을 도배하는 조,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어린 녀석들 치고는 정말 하지 말아야 할 못된 일들을 저질렀던 것 같다.

땅속에 계신 조상 어르신들에 늦게나마 아룁니다.

"죄송합니다"

"그때는 정말 배가 곱았습니다"

2015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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