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by 김 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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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일제의 잔재가 남아있던 소싯적엔 우리는 벚꽃을 '사꾸라'라고 하였다.

일본의 국화라서 그런지 쉽게 변질하거나 위장을 한 사람 역시 사꾸라

같다고 했다. 벚나무는 우리나라 자생종이다

고려의 팔만대장경의 목판은 자생하는 야산의 왕벚나무로 만들었다..

꽃도 귀하지만 목재도 귀중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왜놈들은 자생하는

우리나라의 산벚나무를 닥치는 대로 남획하여 일본으로 옮겨가 심었다.

그리하고서는 왕벚나무의 원 자생지를 일본이라고 세계 식물 도본에

등재시켜 놓았다.


벚꽃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 꽃으로 인해 받은 즐거움보다는 씁쓸한 추억 두 가지를 더듬어 본다.

1953년 6.25 전쟁이 막바지에 치닫던 봄날에 초등학교에, 당시는 국민학교,

입학을 하였다. 지금은 3월 입학이지만 그때는 4월 입학이었다.

인민군에 점령을 당하지 않은 남도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전란 중이라 학교

시설이 제대로 온전하게 남아 있질 않았다.

교실 창문의 유리는 물론 창틀마저도 제대로 붙어 있는 게 없었다.

창문에는 원두막에서 사용하는 마른 억새풀로 엮는 거적때기가

걸려있었다.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교정에는 벚꽃들이 허들어지게

피기 시작하였다. 남녘 땅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 잡은 고향 초등학교는

일제 치하 때 개교하여 본인이 39회 졸업생이니까 45년 이상의 연륜을

가진 학교이다. 그래서인지 교정은 물론 교사 인근의 비탈진 언덕에도

아름드리 벗 나무들이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다.

4월의 바깥 날씨는 아직 서늘하였지만 거적때기를 내리면 바깥 빛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는 거적을 올리고 수업을 진행했다.

벚꽃이 만개하자 이 꽃을 구경(?) 하려고 온 김해 벌판의 벌들이 우리

학교에 등교를 하였다. 창가에 거의 닿을 정도로 벗 나무들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이 벌들의 윙윙 거리는 울음소리가 선생님의 작은 목소리를 잡아

먹어버렸다.

"선생님! 더 크게 말해 주이소."

목소리를 올리던 선생님은 목이 아프신지 창가의 거적을 내리라고 지시했다.

"선생님!

칠판의 글씨가 안보입더."

이른 아침 시간에는 덜한데 한낮이 가까워 올수록 우리는 선생님의

명령에 따라 이 짓을 수 없이 반복하곤 했었다.


군 생활 3년을 진해에서 보냈다.

매년 4월 1일부터 벚꽃 축제를 겸한 진해 군항제가 열린다.

군항제 기간에는 매일 영내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된다.

영내에도 벚나무가 많아 벚꽃 놀이를 즐길 수 있지만 탐방객들의

주 목적은 사병들의 내무실 구경과 군악대 의장대의 시범 관람이다.

오후 5시 탐방객이 썰물처럼 빠지고 나가면 졸병들의 불쌍한 야간 근무가 시작된다.

지금에야 모두들 문화인들이 다 되어서 기본적인 관람 질서를 지키지만

그 당시는 쓰레기를 맘 놓고 아무 데나 버리거나 심지어 내무실 바닥에 침 마저

뱉어놓고 나가던 무지한 시절이었다.

쓸고, 닦고, 광내고, 제일 힘들었던 건 이빨로 접은 모포에 각을 내는 작업이었다.

당시 해병대는 각자 개인 침대를 사용하고 있었다.

졸병들은 자기 침대의 모포는 물론 선임들의 모포까지도 각을 만들어 주어야만 했었다.

거의 매일 자정까지 영내와 내무실을 정리 정돈을 했었다.

새벽이 되면 다시 그 넓은 사령부 건물과 연병장 주위를 다시 돌며 전날 빠뜨린 휴지나

기타 쓰레기를 재차 정리하곤 했었다.

어느 날 당번이 되어 내무실에서 입구에서 반 부동자세로 지키고 섰는데 한 무리의

아가씨들이 들어왔다.

"아저씨 저 모포 안에 나무 넣었죠?"

"아닙니다"

대답을 듣자마자 확인을 한답시고 손가락으로 모포를 쿡 쿡 찌르고 지나간다.

"쌍, 요년들 "

"저걸 다시 복구시키려면 오늘 점심은 종 쳤다."

어젯밤 청소를 하면서 벚꽃이 빨리 떨어지라고 벚나무에 사정없이 물 대포를

쏴 주었는데,,,,

요년들이 화신이 되어 나한테 복수하려 왔나?


금년에는 어디로 벚꽃 나들이를 떠나볼까?

훈련 때 뛰어오르던 천자봉을 찾아 진해로 내려가 볼까.

옛날 님도 만나 보고.......

2016,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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