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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희 Apr 15. 2018

감각은 철학으로부터

도쿄의 ‘시즈코아(SEESCORE)’

도쿄 긴자의 한 골목에는 ‘쌀’을 중심으로 다이닝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하는 편집숍인 ‘아코메야’가 있습니다. 총체적인 다이닝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하기 위해 쌀 뿐만 아니라 반찬, 간식, 조리기구, 주방용품, 책 등 폭넓은 영역의 제품을 판매합니다. 아코메야의 매장을 둘러보면 ‘품질이 탁월하거나, 일상에 풍요를 더하거나, 개성이 있는 상품들을 판매한다’는 아코메야의 제품 선정 기준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매번 아코메야의 제품 큐레이션에 감탄하지만, 그 중에서도 간식코너에서 감각적인 컨셉으로 눈길을 끌었던 ‘시즈코아(SEESCORE)’를 소개합니다. 


이탈리아 전통 디저트인 비스코티를 만들기 위해 복잡한 레시피도, 베이킹 재료나 도구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시즈코아의 ‘홈메이드 비스코티’ 유리병과 달걀 한 알만 있으면 됩니다. 흔한 종이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쿠키 믹스를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세련된 디자인의 투명한 유리병 안에 비스코티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밀가루, 견과류, 말린 과일, 초콜릿 칩 등이 필요한 만큼만 층층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각 재료의 질감과 컬러가 주는 시각적 효과 덕분에 훌륭한 인테리어 소품이 되기도 합니다. 구구절절한 레시피 대신 레시피를 5개의 아이콘으로 단순화해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들도 제품 이용에 무리가 없습니다. 병 안에 준비된 재료와 달걀 한 알을 섞어 오븐에 구워내기만 하면 완성입니다. 시즈코아는 이외에도 일본 전통 간장, 주류, 절임, 드레싱 등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료들을 건조시켜 하나의 유리병에 담습니다. 


홈메이드 비스코티 ⓒSEESCORE


그런데 왜 하필 유리병이었을까요? 시즈코아의 출발점으로 돌아가면 그 이유가 더욱 흥미롭습니다. 시즈코아는 1984년에 유럽의 내열 유리 식기를 일본 내 업체에 판매하는 도매 중심의 유통업체로 출발한 회사입니다. 기능성과 디자인을 모두 갖춘 유럽의 식기들을 오랫동안 일본에 소개하면서 자체적인 안목과 역량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에는 디자인과 기능성을 모두 갖춘 유리병과 자체 병입 식품들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열성이 뛰어난 유리병의 성능은 건조한 식재료들을 담아 장기간 보관하기에 제격이었고, 내용물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특징 덕분에 속재료에 대한 신뢰감과 구매욕을 자극하는 시각적 효과를 톡톡히 볼 수 있었습니다. 출발점을 점으로 남기지 않고, 선으로 확장한 시즈코아의 기지가 돋보이는 성장 과정입니다. 


시즈코아의 제품을 더 특별하게 만드는 건 시즈코아의 기획력입니다. 시즈코아의 대표적인 제품 시리즈 중 하나는 '시간이 맛을 만든다' 시리즈입니다. 모든 음식은 시간을 들여 자연의 힘으로 만들면 첨가물 없이도 충분히 맛이 있다는 철학에 기반한 컨셉입니다. 그래서 시즈코아의 병입 제품들은 다른 레토르트 식품들과는 다르게 바로 먹을 수 없습니다. 시즈코아의 비스코티가 굽는 시간을 필요로 하듯, 간장류나 주류도 필요한 액체류를 별도로 구매해 유리병에 부은 후 장시간 놔 두었다가 먹어야 합니다. 이유 있는 불편함은 공감하는 팬을 만드는 기회가 됩니다. '시간이 맛을 만든다' 시리즈가 10년 이상의 시간 동안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유입니다. 한편 타사와의 콜라보를 통해 제품의 간편성을 높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와인 회사와의 콜라보를 통해 건조한 과일과 향신료가 함께 들어 있는 ‘홈메이드 상그리아’ 유리병을 와인과 함께 판매하는 식입니다. 이유 있는 불편함은 남기되, 극복할 수 있는 불편함은 해소하는 시즈코아의 지혜가 남다릅니다. 


시즈코아는 매력적인 비즈니스 감각만큼이나 가치 있는 철학을 보여주는 회사입니다. 시즈코아는 일본 내 제조, 기술, 유통 등 다양한 분야의 회사들과 함께 ‘Japan Sealine Project’(이하 JSP)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JSP는 일본 각지에 퍼져있는 우수한 제품을 세계에 알리는 프로젝트입니다. 시즈코아는 JSP의 운영회사이자 구심점으로, 회원사들의 연계를 도모하고, 상품 기획 및 개발, 판로 개척, 홍보 등 협력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합니다. JSP는 회원사가 가진 9천개 점포와 매일 2천개 이상의 제품을 소화할 수 있는 물류 시스템을 활용해 지방에는 활력을 불어 넣고, 전 세계에 일본의 우수한 제품을 알립니다. 숲이 많은 일본의 목재로 만든 생활용품, 일본산 곡물과 말린 채소를 섞어 만든 잡곡밥 믹스, 후지 시 사람들의 감각과 기술을 활용한 현대적 디자인의 종이 공예품 등 JSP의 성과는 지역과 영역을 넘나듭니다. 최근에는 ‘맛있는 브런치’라는 테마로 홋카이도, 나가노, 사가 등의 음식을 소개하는 전시회를 개최했습니다. 과거 항구를 통해 전국의 제품들이 거래되면서 문화를 낳고, 후대에 계승되었다는 의미에서 따온 Japan Sealine Project는 프로젝트의 이름에 알맞은 역할을 해내고 있는 셈입니다. 


‘시즈코아’의 사명 ‘SEESCORE’에는 ‘핵심(Core)을 본다(See)’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판매하는 제품에도, 운영하는 프로젝트에도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각 제품마다 상품명을 브랜딩에 활용할 뿐, 시즈코아의 사명을 크게 내세우지 않습니다. 단순히 감각적인 비즈니스가 아니라, 철학을 구심점으로 핵심이 담긴 비즈니스를 이어가기에 드러내지 않아도 빛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 칼럼은 경제 전문 미디어 <이코노믹 리뷰>의 전문가 칼럼에 연재하고 있는 <최경희의 밑줄 긋는 여행>의 2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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