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
늙어가는 것은
(2015.07)
- 나의 멘토이자 친구인 Janice 할머니와의 대화로부터
늙어가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야 함을 의미합니다.
9년 전 남편이 세상을 떠났고
작년 겨울 분신 같았던 친구가 이별을 고했으며
얼마 전 사촌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나의 사람들이 한 명씩 떠나갈 때마다
죽음이란 자연의 순리이니 너무 슬퍼만 말고
산 사람들끼리 한번 더 만날 수 있음에 기뻐하고 감사하자
마음을 다잡아먹지만, 어느 날 문득
밥을 먹다가 혹은 길을 걷다가
내가 죽어야만 끝나게 될 이 숱한 이별들이 버겁고 두려워 숨 막히는 순간이 오면
어쩔 수 없이 가슴을 부여잡고 울음을 토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습니다.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고 영원히 곤두박질 칠 것만 같은 어둠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때
정원에 작은 벌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습니다.
벌새는 한참 주위를 맴돌며 눈물을 거둘 때까지 나를 지켜주었습니다.
나는 벌새가 남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습니다.
손에 잡힐 듯 익숙한 얼굴과 귓가에 무한히 맴도는 목소리에 닿기 위해
허공을 향해 손발을 휘젓고 있을 때
바람 한 점 없던 여름 오후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 지붕 한켠에 걸린 풍경을 흔들었습니다.
나는 나의 친구가 바람을 통해 말을 건네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숨 가쁘게 조여오던 정적이 깨지고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많은 것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음을.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내 옆에 머물러 있음을.
여전히 삶은 외롭고 죽음은 버겁지만
나는 계속 살아가고 늙어갑니다.
언젠가 나 또한 이 세상을 떠나게 되겠지만
그것은 이별이 아니라 내가 사랑했던 누군가의 빈 곳을 채우러 떠나는 여행이 될 것입니다.
벌새가 되고 바람이 되어 이 세상을 다시 찾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계속 살아가고 또 늙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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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ice 할머니와는 2015년 4월, 스탠퍼드 국제 센터에서 처음 만났다. 유학생이나 가족을 대상으로 자원봉사를 해오시던 할머니께서 나의 멘토가 되어주셨기 때문이다. 스탠퍼드 국제 센터에서 주선하는 멘토-멘티 프로그램은 대부분 공급(지역 봉사자)보다 수요(학생)가 많아서 신청 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당연히 선착순으로 매칭되는 줄 알았으나 나중에 할머니께 전해 듣기로 봉사자가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지원했지만 영원히 선택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고(주변에 많았다) 나는 무척 운이 좋았던 셈이다.
할머니와 나는 마음이 잘 맞아서 금세 친구가 되었고 몇 달 안 되어 꽤 깊은 이야기까지도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사촌의 부고 소식을 들은 할머니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시다가 내 앞에서 엉엉 우셨다. 할머니의 두려움과 슬픔이 그대로 전해져 왔지만 그 상황에서 나의 "말"은 아무 힘이 없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께 들은 이야기를 글로 옮기고 그림으로 그렸다. 말 대신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며칠 뒤 할머니께 그림을 드렸는데 그 후로 나는 본의 아니게 "So talented artist"가 되었다. 할머니께 드린 작은 위로에 대한 답례로 7년째 얼마나 많은 칭찬과 격려를 받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머리가 어질하다. 할머니와 나는 서로를 친구로 여기지만 미국에서도 할머니는 할머니다. 언제나 내가 더 많이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