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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된 신고식

by 황경진

여행 넷째 날, 그간 부지런히 달려온 덕에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산타페에 도착한다는 설렘에 아침 일찍 눈이 떠졌지만 마음과는 달리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했다.


오전부터 오락가락하던 빗줄기는 뉴멕시코주에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순식간에 검푸른 구름으로 뒤덮이고 시야가 잔뜩 어두워지면서 빗줄기가 폭우로 변했다. 당황해서 어, 어, 하는 사이 비는 상상할 수 있는 한계치를 뛰어넘고 무한대로 사나워졌다. 더 이상 비가 아니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리고 거대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무지막지한 물벼락이 차의 앞, 뒤, 옆 시야를 커튼처럼 가로막았다. 부옇게 보이던 앞차의 비상등 신호마저 물보라 속으로 사라지고 마침내 가시거리가 0이 되는 지점에 이르렀다. 와이퍼가 쉴 새 없이 발버둥치고 있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바깥이 전혀 보이지 않는 차 안이 낯설게 느껴지면서 두려움에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낯선 땅, 낯선 도로에서 이런 비를 맞닥뜨린 나는 패닉에 이르렀다. 이대로 계속 가다간 앞차와 박을 것 같았고 속도를 더 줄이면 뒤차와 박을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도대체 얼마의 속도로 달려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아는 바가 없었다. 차체가 부서져라 두들겨대는 빗소리도 아득히 멀게 느껴질 만큼 긴장된 상황이었다. 침착하게 빗길을 헤쳐가던 남편도 상황이 지속되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에게는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 시야가 막힌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잠시 후 폭우의 기세가 주춤하면서 앞차의 비상등 신호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깜박이는 불빛이 그때는 정말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앞차도 많이 놀랐는지 갓길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옆으로 빠져 차를 세웠고, 앞차를 따라 우리도 차를 세웠다. 심호흡을 하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사이 큰 트럭 몇 대가 뭐 이런 일에 놀라냐는 듯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비구름이 완전히 넘어가고 시야가 트이자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하얀 구름이 경쾌하게 솟아올랐고 그 사이로 놀랍도록 청명한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슴이 뻥 뚫릴 만큼 시원한 하늘이었다. 이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이방인에게 호된 신고식을 거쳐 마침내 환영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어서 와, 뉴멕시코는 처음이지?


뉴멕시코는 여름이 우기여서 지내는 내내 스콜성 폭우가 자주 내렸다. 운전 중 다시 이런 비를 만나게 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도 시야가 막힐 정도의 비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큰 비구름을 정통으로 뚫고 지나가야만 만날 수 있는 이런 비는 이곳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닌 듯했다.


뉴멕시코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면적이 훨씬 더 넓은 대자연의 땅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우리에게 이곳은 결코 녹록지 않은 땅이라는 것을 미리 알려준 것 같았다. 강력한 첫인상을 남긴 뉴멕시코에서의 생활이 기대되었다. 반갑다, 매혹의 땅 뉴멕시코! (뉴멕시코의 슬로건: Land of Enchantment)


구름과 물안개에 쌓인 도로
지나가는 비구름과 서서히 걷히는 하늘
멀리 보이는 맑은 하늘
마침내 드러난 쾌청한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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