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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하나 글 하나

by 황경진

살면서 처음으로 뭘 그리고 싶었던 날은 스물두세 살 무렵 어느 가을날이었다. 볕이 좋아 유유자적 강가를 거닐다가 문득 그림이 그리고 싶어 졌다.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는데 현실에 부딪혀 꿈을 포기했어요,” 도 아니고 “원래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평생 스케치북을 끼고 살았어요,”도 아니고. 학창 시절 미술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림을 배우거나 그려본 적이 없는데, 아무 맥락도 뜬금도 없이 갑자기 그런 마음이 든 게 하도 신기해서 그때 그 순간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 후로도 종종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가 있었다. 아무 종이에나 끄적일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무시했다. 대학생 때는 졸업과 취업으로 힘들었고 취업 후에는 일하느라 인생이 너무 바빴으니까.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때 그 마음을 좀 더 일찍 들여다보았더라면 어땠을까 싶었다.


평생 그림과 상관없이 살아갈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림을 배울 기회가 생겼다. 결혼 후 남편이 박사 공부를 위해 유학을 떠나면서 나도 함께 미국으로 건너오게 되었다. 쳇바퀴 돌듯 정신없이 돌아가던 회사원의 삶에서 벗어나 한순간 백수가 되었다. “유학생의 부양가족” 신분으로 미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생산 활동에는 일절 참여할 수 없었으므로 그나마 가장 능동적인 주체가 될 수 있는 방법은 다시 학생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참에 그림을 배워보기로 했다.


포트폴리오가 없어서 원서만 내면 합격시켜주는 동네 커뮤니티 칼리지에 지원했다. 서른이 넘어 열여덟아홉 친구들과 수업을 들으려니 많이 떨렸다. 다행히도 수업에는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아줌마와 아저씨, 은퇴하고 오신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계셨고 이들은 나에게 끊임없이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나보다 인생을 많이 산 지혜로운 이들과 함께 수업을 듣게 된 건 행운이었다.


2년 과정을 수료했다고 인생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평생 즐길 일을 이제라도 시작하게 된 게 기뻤다. 그림은 어떻게 나에게 왔을까. 왜 이제야 왔을까.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는 남았지만.


어찌 되었든 2015년부터 작업을 이어오다 보니 이런저런 그림들이 많이 쌓였다. 문제는 이 그림들이 너무 쓸 데가 없다는 것이다. 집에라도 걸어놓고 지인들에게 보여주면 소소한 즐거움이라도 될까 싶어 작년 연말 방구석 전시회를 기획했지만, 코로나 19 재확산으로 그마저도 취소했다. 가까이 지내는 지인 한 명이 아쉬워하며 온라인으로라도 올려보라기에 이곳에다가 배를 띄운다.


이 매거진은 지금껏 그린 그림과 쓴 글들의 저장소가 될 것 같다. 페북과 블로그 등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그림을 모아 그림 한 편과 글 한 편을 함께 올릴 계획이다. 예전에 그린 그림을 보면 손발이 오그라들어 차마 공개할 용기가 나지 않는 작품들이 꽤 있다. 고로 최근에 그린 그림과 올해 새로 그릴 그림을 주로 올릴 예정이다.


목적지도 없는 이 배는 과연 어디로 흘러가게 될지 궁금해진다.


2021.1.4


2010년 9월 바르셀로나 여행 중 끄적이며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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