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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사랑과 배신의 병상

단편소설

by 경국현

일체 현상계는 꿈이요 허깨비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요 이슬 같고, 번갯불 같은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니라.
<금강경>





눈을 떴다.
귀를 간질이는 속삭임과 커튼 틈으로 스며드는 빛이 나를 깨운다.

“일주일 만에 눈 떴네.”

아내의 목소리다.
하지만 이상하게 들린다.
따뜻한데, 너무 멀다.
가슴에 닿지 않는다.

눈물이 흐른다. 감정은 아니다.
그저 생리적인 반응일 뿐이다.

그녀는 내 귀에 다시 속삭인다.

“울지 마.”

그러나 나는 내가 우는 건지, 내 몸이 우는 건지조차 알 수 없다.
이제는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내 아내다.
25년을 함께한 사람.
단발머리, 하얀 얼굴, 입꼬리에 어린 시절의 미소가 묻어 있었던 그 여인.
그 모습이 내 가슴을 설레게 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감각을 잃었고, 그녀는 나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나는 사고로 쓰러졌고, 병상에 누운 지 6개월이 넘었다.
몸의 감각은 사라졌고, 눈만 겨우 뜰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살아줘서 고마워.”
“정말 다행이야.”

그 말들이 나를 더 아프게 한다.
살아 있다는 것이 이토록 절망스러울 수도 있다는 걸,
그들은 모른다.

시간은 무의미하다.
하루와 한 달의 경계는 사라졌고,
나는 끝없는 어둠 속을 홀로 떠돈다.

그 와중에, 그녀는 매일 나를 돌봤다.
몸을 닦고, 굳은 근육을 주무르고, 입술에 로션을 발라주었다.
고마웠다. 정말로.

하지만, 어느 날 그녀의 손길이 낯설었다.
익숙하지만 멀었고, 부드럽지만 공허했다.

그리고 그가 보였다.
내 가장 친한 친구.
어린 시절부터 모든 걸 함께한 사람.

그는 내 곁에 있었고, 그녀의 곁에도 있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들었다.

“오늘 밤…, … 사랑해.”

그 순간, 내 무감한 육체에 격류처럼 감정이 몰려왔다.
절망, 혼란, 배신, 분노.
움직일 수 없었지만, 나는 확실히 느꼈다.

그들은 3개월 전부터 연인이었다.
내가 쓰러진 후, 그녀는 외로웠고, 그는 안쓰러웠다.
위로의 말은 밤마다 이어졌고,
병원 앞 카페에서 조심스레 마주한 눈빛이 모든 것을 말했다.

그들의 손끝은 떨렸다.
그리고 결국, 서로에게 기대었다.

첫 키스는 눈물 속에서 시작됐다.
죄책감과 사랑, 욕망이 뒤엉켰다.
침묵 속에서 옷이 벗겨졌고,
그들의 몸은 마치 처음이자 마지막인 듯 서로를 탐했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여자가 되었고,
그는 그녀 안에서 남자가 되었다.

죄의식은 사라졌다.
그날 밤, 그녀는 울며 웃었다.
그의 손길은 남편과의 지난 수년간 느끼지 못한 떨림이었다.

나는 그것을 들었고, 느꼈고, 알고 있었다.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내 내면은 산산이 부서졌다.

나의 전부였던 두 사람.
사랑했던 아내, 신뢰했던 친구.
그들이 하나가 된 그날 밤, 나는 죽었다.

그들은 여전히 내 곁에 있었다.
친구는 등을 두드렸고, 그녀는 손을 잡았다.

나는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고맙다”고,
“그래도 사랑했다”고,
“그래도 용서한다”고.

나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개뿔.’

내가 움켜쥐고 있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
사랑, 신뢰, 가족, 노력, 명예, 돈—
모두 허상이었다. 개뿔이었다.

나는 살아 있다.
하지만, 영혼은 이미 떠났다.

오늘 밤, 나는 죽는다.

그녀는 알까.
그는 알까.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다.

속삭인다.
“개뿔, 이게 인생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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