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수학을 가르치는 중학교 교사다. 지금은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학창 시절엔 교회가 내 세계의 중심이었다. 1980년대, 교회나 성당은 하이틴 감성의 무대였고, '교회 오빠'는 소녀들의 마음을 간질이는 존재였다. 친구들과 귓속말로 속삭이며, 성경책을 가슴에 품고 수줍게 앉아 있던 시간. 나도 그 시절, 그런 소녀였다.
모태신앙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의 권유로 중학교 2학년 무렵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곳엔 고등학교 2학년 오빠가 있었다. 여성호르몬이 막 피어나는 시기, 처음 맞이한 생리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나는, 막연한 호기심과 가슴 설렘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세 살의 간극은 열네 살 소녀에게 너무 멀고도 깊은 강물이었다. 그는 아마 나를 귀엽고 순진한 동생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시간은 마치 비 내리는 유리창 너머로 흘렀고, 내 짝사랑은 일기장 속에 조용히 겹겹이 쌓여갔다. 대학에 입학해 청년부에 올라갔을 때, 오빠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여름, 군복을 입고 휴가를 나온 그가 검게 그을린 얼굴로 나타났다. 낯선 듯 익숙한 그 얼굴은, 어느새 시간이 우리를 같은 물가로 데려다 놓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많이 컸네. 어느 대학 다녀?" "숙명여대 수학과요." 그는 한양대 전자공학과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강촌으로 향하던 봄날, 철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던 길을 함께 걸었다. 햇살은 따뜻했고, 하늘은 눈부셨다. 그날, 우리는 첫 키스를 했다. 낯설고 차가운 입술의 감촉은 이내 따뜻하고 촉촉한 설렘으로 번져갔다. 육체적으로는 조심스러웠다. 그의 떨리는 손길을 나는 몇 번이나 조용히 밀어냈다. 그러나 몇 번은, 옷 위로 그 손이 살짝 닿았던 기억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생각보다 더 가볍게 부서졌다.
그는 더 이상, 내 일기장 속에 있던 '교회 오빠'가 아니었다. 군대에서 돌아온 그의 삶에는 술이 있었다.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된다는 이야기, 교회 언니들의 걱정스러운 목소리. 나는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그는 취한 채 내게 손찌검을 했고, 다음 날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에 나는 다시금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나는 어린 시절, 술에 취한 아버지의 폭력을 보며 자랐다. 내 안에 절대로 허용할 수 없는 선이 있었고, 그는 그 선을 넘었다. 사랑은 콩깍지를 벗기자마자 달걀껍데기처럼 쉽게 깨졌고, 나는 그 사랑을 스스로 접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인천의 한 중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교회 권사님의 주선으로 중매를 통해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는 다정다감했고, 나를 공주처럼 아껴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착함을 믿고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은 내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사람이 변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를,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상, 말투, 옷차림, 종교, 첫인상에서 오는 막연한 호의. 사람을 판단할 때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렇게 나는 그와 결혼했다.
그는 경제 관념이 없는 사람이었다. 직장을 자주 그만두었고, 생활비는 오롯이 내 수입으로 충당했다. 용돈이 떨어지면 시어머니나 내게 손을 벌렸다. 거절하면 가출했고, 며칠 뒤 아무 일 없던 듯 돌아왔다. 딸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갈 무렵, 나는 더 이상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차를 사달라는 요구를 거절하자 그는 다시 집을 나갔고, 이번엔 1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차를 사주면 돌아오겠다는 남편을 보고 시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했고, 시누이는 이혼을 권유했다. 나는 신앙의 힘으로 버텼다. 새벽기도에 매달리며 돌아온 탕자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1년 만에 돌아온 그는 실실 웃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왔다. 나는 그 순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이혼을 결심했고, 그 후로는 교회도 다니지 않았다.
세월이 흘렀다. 우연히 만난 교회 언니와의 대화에서, 오빠의 이야기가 나왔다. 오빠 여동생과 동창이라는 그녀는 오빠가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 부부싸움이 잦고, 여동생도 걱정이 많다는 이야기. 그때는 그러려니 하고 흘려들었다.
그 후, 싸이월드를 하던 어느 날, 오빠의 계정을 우연히 발견했다. 사진 속 그는 여전히 지적이고 단정했다. 가족 사진도 몇 장 보였다. 그는 이제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조심스레 댓글을 남겼다. "여전히 좋아 보이네요."
기대는 없었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조용히 움직였다. 시간이 지나고, 그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정말 몰랐어. 사진이 없어서 너일 거라 생각도 못 했어. 이름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너라는 걸 알았어. 잘 지내고 있지?"
그의 말에 나는 웃음이 났다. 어설프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그 문장들. 잊혔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그렇게 다시 문을 열었다.
우리는 만났다.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 앞에서, 우와, 참나, 허... 감탄사만 오갔다. 한참을 말없이 웃기만 했다. 17년 만이었다. 그의 얼굴엔 세월이 흘러 있었지만, 그 눈빛은 그대로였다.
명함을 건네받았다. 그는 IT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였다.
"성공했네요." "아니야. 하루하루, 그냥 살아가는 거지."
그날 우리는, 저녁을 함께 먹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우리는 다시,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고기를 좋아하던 나의 취향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한우집에서 비싼 부위를 시키고, 술을 권했다. 나는 웃으며 받았고, 그 웃음은 오래 전, 철길 위의 햇살처럼 따뜻했다.
노래방에서는 내가 희나리를 불렀고, 그는 노사연의 '만남'을 불렀다.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그는 내 어깨를 감쌌다. 나는 그 품에 기대었고, 노래가 끝날 무렵 그는 나를 안은 채, 천천히 입술을 맞추었다.
키스는 오래도록 이어졌고, 그 안엔 말로 하지 못한 시간들이 있었다. 격렬하고도 조용한, 아프고도 달콤한 기억의 교차. 우리는 말없이 모든 것을 허락했다. 나도, 그도, 이미 서로의 과거가 되어 있었기에.
그날 이후, 우리는 '지금'이라는 이름의 사랑을 시작했다. 이별도 없고, 결혼도 없고, 책임도 없는 사랑. 그 사랑은 불완전하지만,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충만했다.
지금, 그는 환갑을 앞두고 있고, 우리는 14년째 그런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여전히 가정을 유지하고 있으며, SNS 속 그는 모범적인 가장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일주일에 서너 번,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고, 가끔은 주말을 나눈다.
내가 그에게 물은 적이 있다. "내가 오빠에게 뭐야?"
그는 웃으며 말했다. "넌 내 마누라야."
"그럼, 집에 있는 사람은?" "애들 엄마지."
그의 대답은 여전히 장난스러웠지만, 그 말 속엔 어떤 진심이 묻어 있었다. 아마도, 우리가 그토록 오래 기다렸던 진심.
이 사랑은 설명되지 않는다.
윤리도, 도덕도, 정의도 담을 수 없는 사랑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의 손을 잡는다. 오래도록, 아주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