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출근 시간, 창밖으로 스치는 아침 햇살은 따뜻했지만, 마음은 늘 싸늘했다.
송파의 아파트에서 나는 동쪽으로, 남편은 서쪽으로 출근했다. 각자의 시간 속에서, 각자의 목적지로 흩어졌다. 같은 집에 살지만, 우리는 함께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남편은 증권사 지점장, 나는 K은행 부지점장. 예전엔 같은 은행, 같은 지점에서 일하던 선후배였고, 연인이었고, 결국 부부가 되었다. 하지만 결혼 20년 동안 쌓인 것은 애정이 아니라 침묵의 벽이었다.
그가 거실에 있으면 나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도 안방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마주치지 않기 위해 서로 배려하는 삶이었다. 아니, 서로를 인생에서 지운 삶이었다.
딸이 하나 있다. 이제 대학생이 되어 집에 머무는 시간도 줄었다. 송파의 집은 남편 명의, 왕십리 뉴타운엔 내 이름으로 된 집이 있다. 그리고 남편도 모르는 강릉의 작은 아파트 하나. 언젠가 맞을지 모를 이별을 위한, 나만의 대비였다.
어느 금요일, 남편이 문자를 보냈다. “내일 저녁 셋이서 밥 먹자.” 선약은 없었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있다”고 답했다. 반복되는 잔소리와 싸늘한 공기 속의 주말, 나는 피곤했다. 그래서 대학원에 진학했다. 토요일마다 당당하게 집을 나설 수 있었다.
경영대학원, 그곳엔 또 다른 내가 있었다. 평일의 무채색을 벗어던진, 주말의 탈출구였다.
첫 수업의 교수는 도발적이었다. “왜 여기에 왔습니까?”
그는 질문했고, 도전했고, 날카로웠다. “20년씩 회사 다닌 분들이 대학원 와서 뭘 바꾸겠다는 겁니까. 대학원이 인생을 바꿔줄 거라 믿습니까?”
나는 남편이 보기 싫어서 왔는데, 그건 말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의 질문 앞에서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세 번째 도전 끝에 수강신청에 성공한 강의였다. 그의 수업은 인기가 많았다. 그는 강의가 아닌 삶을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절세 전략 중 부부 공동명의 이야기가 나올 때,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무늬만 부부인데요.”
조용한 강의실에 내 혼잣말이 울렸다. 사람들은 웃었고, 그는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예전엔 부부가 10년 넘게 같이 못 살았죠. 병, 전쟁, 사고… 빨리 죽었으니까요. 그땐 죽은 배우자를 늘 사랑으로 기억했죠.”
그리고 덧붙였다. “지금은 오래 삽니다. 함께 늙어가며 배우자가 남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말은 내 안에 파문을 일으켰다. 우리는, 남편과 나는, 그렇게 남이 되었다. 부부라는 가면을 쓴 남.
수업이 끝나고 캠퍼스를 나서던 길, 그가 물었다. “약속 있어요?”
“없어요.”
“커피나 할까요.”
오래된 한옥을 개조한 카페였다.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친구도 동석했다. 담백한 대화 속에 그는 자신이 이혼남이라 말했다. 지금은 제주에 살며 강의 있을 때만 서울에 온다고.
“혼자 살아서 외롭지 않아?” 친구가 물었다.
그가 조용히 대답했다. “외로운 건, 같이 있는데 외로울 때죠. 그게 진짜 외로움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과 나는 함께 살고 있지만, 오래전부터 서로에게 외로움의 그림자였다.
술자리가 이어졌다. 유자 막걸리를 마시며 그는 친구를 슬쩍 보며 말했다.
“안 가냐?”
친구는 웃으며 일어섰다. 나와 그, 단둘이 남았다.
“친구 쫓았네요?”
“너랑 둘이 있고 싶어서.”
그 순간, 마음이 저릿했다. 언제 마지막으로 이런 떨림을 느껴봤던가. 나는 여자가 되었고, 그는 남자가 되었다.
제주행 비행기에서 나는 창밖을 오래 바라보았다. 구름은 아래로 흐르고, 마음은 위로 떠올랐다. 나는 결혼했지만 오래전부터 혼자였다. 이 고요한 고백이, 나를 데려가고 있었다.
제주 공항. 그는 도착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흰 셔츠에 청바지, 검은 테 안경. 낯익지만 낯선 남자.
그는 내 짐을 들었다. 말 대신 침묵, 그리고 그의 손이 내 심장을 잡아끌었다. 그의 차는 조용했고, 창밖 풍경은 천천히 흘렀다.
“어색하지?” 그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애인하기로 했잖아. 뭐든 편하게 말해.”
“편하게 말하는 건 어려워요. 교수님이고, 난 제자고… 위험한 관계잖아요.”
“위험?”
“마음이 미끄러질까 봐요.”
그의 집은 제주 바다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있었다. 현관을 열자 나무 향이 가득했다. 원목 식탁, 차분한 조명, 넓은 창, 그리고 바람 소리.
나는 씻고 나왔다. 거울 앞에 서서 립스틱을 발랐다. 사랑일까, 도피일까. 하지만 내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나는 이미 넘어와 있었다.
소파에 앉자 그는 와인을 가져왔다. “건배는 하지 말자.”
“왜요?”
“건배하면 끝나는 느낌이야. 그냥 마시자. 계속될 이야기처럼.”
와인이 붉은 실타래처럼 목을 타고 흘렀다. 잔잔한 음악이 귀를 감싸고, 그는 조심스럽게 내 옆에 앉았다. 자연스러운 침묵, 그 속에서 내가 먼저 물었다.
“교수님, 외롭지 않아요?”
그는 웃지 않았다. 대신 손을 내밀어 내 손등을 감쌌다.
“외롭지 않으려고 너를 초대한 건데.”
침묵. 눈물이 흘렀다. 이유 없이, 소리 없이. 그는 내 손을 잡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 다음은 설명할 수 없다.
그의 손이 내 목덜미를 감싸고, 입술이 닿고,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옷을 벗겼다. 나쁜 짓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나는 여자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며,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 밤, 나는 여자로 무너졌고, 여자로 일어섰다. 사랑은 죄가 아니었다.
그 밤, 나는 여자로 무너졌고, 여자로 일어섰다. 사랑은 죄가 아니었다.
아침 햇살이 얇은 커튼 사이로 스며들었다. 제주의 언덕배기 작은 집은 조용했다. 어젯밤의 모든 것들이 피부에, 호흡에, 가슴에 고요히 스며든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거울 속 여자는 어제보다 더 환하고, 어제보다 조금 덜 외로워 보였다. 속눈썹이 떨릴 때마다 그의 손길이 떠올랐고, 몸이 함께 떨렸다. 립스틱을 꺼내 평소보다 진한 색을 발랐다. 거울 앞에 미소가 번졌다. 여자가 여자로 되어가는 기쁨, 그 안에 내가 있었다.
그는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향기로운 원두 향이 그의 몸을 타고 거실을 가득 메웠다. 그의 등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말했다.
"좋은 밤이었어요."
그가 돌아보며 웃었다.
식탁에 마주 앉아 커피를 나누었다. 말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말 없는 대화는 그 어떤 수다보다 풍성했다. 전날 밤의 흔적이, 아직 우리 사이에 살아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강릉으로 돌아왔다. 회사에서 얻어준 작은 아파트. 바닷바람이 낯설었지만, 어딘가 달라진 자신을 느꼈다. 거울 앞에 섰다. 그 속의 얼굴은 내가 알던 내가 아니었다. 욕망과 자유, 그 경계에서 선택한 여자의 얼굴이었다. 아내도, 엄마도, 은행 직원도 아닌, 여자라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밤이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짧은 통화에도 몸이 따뜻해졌다. 그의 음성은 바람처럼, 물처럼, 내 안에 스며들었다.
남편은 여전히 가끔 문자만 보냈다. 업무에 대한 사무적인 정보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종료된 사이였다.
딸만이 가끔 전화를 했다. “엄마, 잘 지내?”
“응, 잘 지내. 너는?”
그러나 마음 한켠엔 늘 미안함이 있었다. 한 여자로 산다는 것은 희생을 요구받는 일이다. 사회와 분리된 존재로 살고 싶다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이며, 또 얼마나 진실한 위선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나는 내 삶을 선택했다. 사랑을, 외로움과 쾌락과 희망을 함께 선택했다. 그와 함께한 밤이 나를 살아 있게 만들었다. 그 손길, 눈빛, 온기. 그것이 나를 움직이는 이유였다.
강릉에서의 삶은 조용했다. 바닷바람은 매일 같은 풍경 속에서 늘 다른 감정을 불러왔다. 퇴근길 어스름한 노을과 익숙한 파도 소리 속에서 나의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지점 업무는 느릿했고, 사람과의 대화는 오히려 많아졌다. 서울에서는 늘 쫓겼지만 여기선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내 목소리도 점차 부드러워졌다.
그와의 관계는 깊어졌다. 그는 주말마다 강릉으로 왔고, 방학이면 내가 제주로 갔다. 주말이 내 삶의 중심이 되었다.
비 오는 어느 토요일, 그는 강릉역에 도착했다. 비가 내리는 날, 감정은 더 부유한다. 우산을 씌워주며 내 어깨를 감싸 안았을 때, 나는 그의 허리를 꼭 잡았다.
"여기 공기, 네 얼굴 같아. 잔잔하고 부드럽고, 뭔가 움직이고 있어."
나는 웃었다. 그의 말은 늘 시 같았고, 지금은 그 시가 내 안에 머물렀다.
집에서 함께한 저녁 식사. 조용한 숟가락 소리. 모든 것이 하나의 풍경처럼 이어졌다.
식사 후, 우리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에는 비가 가늘게 흩날렸다. 그의 손이 내 손을 감쌌다. 그 온기가 심장을 덮었다.
"후회 안 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시간이 나의 옳은 선택이라는 걸.
그날 밤, 우리는 오래도록 서로를 안았다. 욕망이 아닌 위로로, 상처가 아닌 이해로. 그는 조심스럽게 나를 안았고,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의 숨결이 나를 덮을 때, 나는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삶은 이렇게도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를 통해 배웠다.
그의 숨결이 나를 덮을 때, 나는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삶은 이렇게도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를 통해 배웠다.
강릉으로 발령받은 첫 주말은 혼자였다. 금요일 저녁, 바닷바람이 텅 빈 집 안으로 스며들었다. 냉장고엔 물 한 병과 과일 두 개, 전자레인지에 데운 컵라면이 전부였다. 식탁 의자에 앉아 손등을 바라보았다. 은은한 조명 아래, 마른 손등의 혈관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결혼 18년 차. 절반은 타협, 절반은 침묵이었다.
서울의 집엔 여전히 남편과 딸이 있었다. 거실 벽엔 제법 멀쩡한 부부 사진도 걸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집에서 숨을 쉴 수 없었다. 남편의 기침 소리조차 낯설어졌다.
“이 밤, 불 꺼진 집에서도 난 살아 있어.” 그렇게 강릉에서 첫날 밤을 보냈다.
두 달 전, 나는 이혼했다. 남편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아니, 받아들이지 않으려 애쓰는지도 모른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교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보고 싶어요.”
짧지만, 많은 말을 품은 문장이었다.
잠시 후 답장이 도착했다.
“나도, 널 생각하고 있었어.”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일부러 꺼둔 집 안의 불 속에서 나는 앉아 있었다. 창밖은 어두웠지만, 가슴속에 불이 켜진 듯했다. 희미하지만 확실한 온기였다. 남자의 온기.
나는 와인을 꺼냈다. 그와 함께 마시던 레드 와인. 잔을 따르며 그의 말이 떠올랐다.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게 아니야. 함께 있어도 혼자라는 걸 느낄 때, 그게 진짜 외로운 거야.”
나는 그 말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젠 혼자여도 괜찮아. 아니, 혼자이기에 더 자유로워.”
딸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잘 지내고 있지? 엄마는 오늘 바다를 보며 네 생각을 했어. 보고 싶구나.”
곧 답장이 왔다.
“엄마, 나도 보고 싶어요. 나중에 강릉 갈게요. 따뜻한 밥 먹고, 쉬어요.”
나는 미소 지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안엔 고통도, 그리움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 나는 변화의 문턱 위에 서 있었다.
제주엔 사랑이, 서울엔 고통이, 강릉엔 고요한 시간이 있었다.
그는 여전히 제주에 있었다. 우리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각자의 삶을 살았다. 사랑은 삶을 바꾸지만, 동시에 삶이 사랑을 흔든다.
그가 떠난 밤, 나는 그가 누웠던 자리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아직 잔향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가 웃으며 말한 한마디가 떠올랐다.
“우리, 그냥 지금처럼만 있으면 돼요?”
그 말은 왠지 슬펐다. 그는 나를 배려하고 있었고,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말없이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거울을 보았다. 늙어가는 남자의 얼굴. 그 남자에게 묻고 싶었다.
“너는, 그녀와 함께할 준비가 되었는가?”
사랑은 의지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삶이 감당해야 하는 감정이다.
그녀는 강릉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나는 제주에 나만의 세계를 구축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나, 혈액암 있어요. 네 번째 해예요. 지금은 잘 관리하고 있고, 1년만 더 지나면 완치 판정이래요.”
그녀는 담담히 들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그 이후, 그녀는 단 한 번도 내 병을 묻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아픈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나는 그게 고마웠다.
그녀의 강릉은 이제 나의 마음속 지도가 되었다. 그녀의 출근길, 점심을 먹는 식당, 잠시 앉는 벤치까지. 나는 제주에 있으면서도 그녀와 함께 그 도시를 걷고 있었다.
다음 주말, 나는 아무 약속 없이 강릉에 갈 예정이다. 그저 그녀를 보기 위해. 그날 제주 바람은 세차게 불었지만, 나는 알았다. 그 바람 끝엔 그녀가 있다는 걸.
강릉의 겨울은 생각보다 매서웠다. 여자는 서울을 떠나 지방 도시에서의 삶을 상상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도시는 해방감을 주었다. 남편에게서, 과거의 나에게서.
그녀는 다시 제주로 향했다. 그리고 그날 밤, 오랜만에 그의 품에 안겼다.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나, 백혈병이야. 이대로면 1년 후면 완치래. 그런데… 늘 불안하지."
그의 눈은 담담했다. 오히려 무표정에 가까웠다.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잘 지내잖아요. 그걸로 충분하죠.”
그녀는 조용히 이불을 끌어올렸다. 누군가의 은행 계좌 잔고를 확인하듯, 사적인 정보를 조용히 정리하듯.
“놀라진 않아?”
“왜요, 놀라야 해요?”
남자는 작게 웃었다.
“무거운 얘기잖아.”
“무거운 얘기 해도 돼요. 근데… 전 그런 거 잘 몰라요. 그냥, 지금 우리가 잘 지내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녀의 말은 가벼웠지만 무심하지 않았다. 감정을 멀리 두려는, 조용한 방어였다.
그날 밤, 그녀는 그의 품에서 잠들었다. 그러나 그는 잠들지 못했다. 그녀의 고른 숨소리 위로, 그의 생각은 쉼 없이 흘렀다.
‘이 사랑은 가능한가. 이 관계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의 시간으로 남을까.’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별 감흥이 없었어.”
그의 병에 대해 들었지만, 그녀는 ‘죽음’이라는 단어조차 떠올리지 않았다. 그의 말이 이상하게도 ‘괜찮아’로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업무 중 문득, 그의 말이 맴돌았다.
‘무거운 이야기잖아.’
그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의 병보다, 무겁지 않다고 말한 자신의 태도가. 그녀는 자신이 도망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날 밤, TV를 틀고 와인을 따랐다. 그의 부재가 비어 있는 시간에 스며들었다. 핸드폰 화면에 짧은 메시지가 떴다.
“강릉은 춥지?”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 답장을 보냈다.
“춥지만, 덜 추워졌어. 그쪽은 어때요?”
“여기도 춥지. 근데, 너 생각하면 따뜻해져.”
그녀는 웃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생각했다.
‘지금 이 감정이, 진짜 사랑일까?’
의심이 밀려왔다. 확신하던 마음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스탠드를 끄고 조용히 누웠다. 어둠 속에서 떠오른 그의 얼굴은, 낯설고도 따뜻했다.
어둠 속에서 떠오른 그의 얼굴은, 낯설고도 따뜻했다.
제주 공항. 구름 사이로 햇살이 길게 뻗어 있었다. 그녀는 캐리어 손잡이를 쥐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가 검은 모자에 청바지를 입고 늘 그렇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늘 같은 자리에 있어 주는 사람.’
차 안은 조용했다. 풍경은 빠르게 지나갔고, 야자수 잎은 춤을 추듯 흔들렸다.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대학원 첫 수업을 떠올렸다.
그는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말했다. “왜 여기에 왔습니까?”
학생들은 웃었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돈 벌려고요? 승진하려고요? 성공하려고요? 그럼 늦었습니다.”
그녀는 느꼈다. ‘이 사람, 뭔가 다르다.’
그의 강의는 말보다 감정으로 울렸다. 자가, 인생, 외로움, 실패, 사랑—그의 화법엔 인생이 녹아 있었다.
그땐 몰랐다. 왜 그렇게 숨 가쁘게 말하는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누군가를 흔들려 하는지.
숙소 창가에 선 그녀는 바다를 바라보다 문득 그 밤을 떠올렸다.
“사실··· 나, 백혈병이야.”
그의 고백은 담담했고, 농담처럼 들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의 강의는 죽음을 등진 자의 열정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흔들고 싶었던, 살아 있다는 절규였다.
그녀는 베란다 문을 열었다. 소금기 어린 바닷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그는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다가가 말했다.
“교수님, 아니… 당신.”
그가 고개를 돌렸다. “응?”
“강의실에서, 그렇게 숨 가쁘게 말하던 거… 이제 알 것 같아요.”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그녀는 그의 심장에 자신의 심장을 포갰다. 뜨거운 피가 섞였다. 그의 혈액 속에 그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끝을 알고 있었기에,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다.’ 그녀는 이제야 남자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밖에서는 어두운 바다가 고요한 밤을 삼키고 있었다. 태초의 흑암처럼, 그 밤은 오래도록 깊고 따뜻했다.
밖에서는 어두운 바다가 고요한 밤을 삼키고 있었다. 태초의 흑암처럼, 그 밤은 오래도록 깊고 따뜻했다.
바람이 바뀌었다. 제주의 봄은 여전히 바닷바람을 품고 있었지만, 그 안에 미세한 온기와 빛이 섞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제주로 한 달 만에 내려왔다. 그는 완치 판정을 인정해주는 의사의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어렵게 받아온 서류였다.
처음엔 그녀가 그것을 지나쳤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달랐다. 아무렇지 않은 듯 평온했지만, 어딘가 단단했던 긴장감이 풀린 얼굴이었다.
커피를 내리며 그가 중얼거렸다.
“이제 괜찮대.”
그녀는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완치라고는 안 했어. 그냥… 건강한 사람과 다르지 않대. 이대로만 관리하면 평균수명도 산다고.”
그녀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웃었다. 안도와 기쁨,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공허함이 섞인 미소였다.
“나 이제, 혈액암으로는 안 죽나 봐.”
그녀가 작게 물었다.
“…죽으면 어쩌려고 했어요.”
그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말했다.
“죽는 건 별로 안 무서웠어. 근데 너를 두고 가는 건 아쉬웠지.”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 눈을 던지며, 커피잔을 조용히 들었다.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고요했다.
그는 그녀를 바닷가 작은 식당으로 데려갔다. 해산물 냄새가 담백하게 풍기던 오후.
“이젠 조금 천천히 살고 싶어. 세상에 쏟아붓는 말보다, 단 한 사람을 위한 강의만 하고 싶어.”
그녀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우리…, 결혼할까요?”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는 지금… 너의 사랑이 너무 커.”
“싫어요?”
그는 맥주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끔은 멀리 있어야 더 오래 갈 수 있는 거야.”
그녀는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마음이 아릿했지만, 동시에 따뜻했다.
며칠 뒤, 그녀는 강릉으로 돌아왔다. 출근 전 거실 창문을 열었다. 바닷가에 묶여 있는 배들이 눈에 들어왔다. 핸드폰 화면을 켜자 그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오늘도 나의 심장이 뛰는 걸로 충분해. 보고 싶다. 그 말도 오늘은 하지 않을게. 내 심장에 너의 심장이 같이 있어.”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슬픔도, 덮는 기쁨도 아닌, ‘이렇게 살아도 좋다’는 마음.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들과의 사랑은, 소유가 아닌 함께 존재하는 방식으로 완성되고 있었다.
그들과의 사랑은, 소유가 아닌 함께 존재하는 방식으로 완성되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서울 본사로 복귀하게 된 건 생각보다 빨랐다. 강릉에서의 근무는 2년으로 끝났다. 그녀는 오랜 시간 창밖만 바라보았다. 창밖의 하늘은 청명했고, 그 안에 단 하나의 구름이 떠 있었다.
사랑도 그 구름 같았다. 흐르지만 멈추지 않고, 떠 있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
그녀는 전화기를 들었다. 그는 받지 않았다. 잠시 후,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지금 산책 중이에요. 바람이 조금 불어요. 당신하고 같이 걸으니 좋네요.”
그녀는 혼잣말처럼 답장을 보냈다.
“서울로 올라가야 해요.”
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알았다. 그가, 무겁게 숨을 들이마셨을 것을.
밤이 되어서야 전화가 왔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고 단단했다.
“잘되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난 너를 사랑해.”
“저도 사랑해요.”
서울에서의 삶은 다시 숨 가빴다. 그러나 그녀는 예전처럼 허무하지 않았다. 퇴근 후 고단한 몸을 이끌고 돌아와도, 혼자라서 외롭지 않았다. 창틀에 부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 그가 옆에 있었다. 식탁에 앉으면, 그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는 지금도 제주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고 있을 것이다. 그의 손을 잡고 걷는 그녀는 행복했다. 그의 손은 따뜻하게 그녀의 손을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알았다. 보고 싶은 마음으로 텅 빈 가슴이 아닌, 사랑이 충만하여 넘치는 기다림.
햇살이 차분히 내리는 카페 구석, 그는 책을 읽고 있었다. 둘은 말없이 마주 앉아 있었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계속 이렇게 지내도 괜찮을까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살지 않아도, 서로를 살아가게 하는 것.”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마지막까지 보고 싶은 사람은 당신이에요.”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마지막까지 같이 있어 줄게요.”
그가 일어나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당황한 그녀를 보며 그가 말했다.
“죽는 날까지 사랑하면서 살자. 사랑하기엔, 우리가 가진 시간이 너무 없어.”
서울과 제주, 가장 먼 거리. 그러나 그들 사이엔 불확실함이 없었다. 같은 하늘 아래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그들은 충분했다.
그렇게, 사랑은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