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장편소설, 부부
자기 얼굴에 침 뱉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나일 것이다.
지금 내 앞에 벌거벗은 여자가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누워있다. 요즘 내가 오빠 동생 하면서 만나는 여자이다. 나는 그 여자의 몸 한가운데에 나의 중심을 넣고 있다.
나의 손에는 핸드폰이 있고, 20초의 짧은 동영상이 담기고 있다. 여자가 뭐하냐고 물으면서 찍지 말라고 한다. 지울 거라고, 얼굴 안 나온다고 나는 말한다.
너의 쓸쓸함을 위로하며···, 문자와 함께 방금 찍은 동영상을 카카오톡으로 친구에게 보낸다. 친구는 암에 걸려 대학병원에 입원하여 항암치료를 하고 있다. 죽어가는 놈이다. 친구가 잠시라도 시간을 재미있게 보냈으면 좋겠다.
난 즉흥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특히 남녀 관계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친구한테 미친 새끼라는 문자가 오고, 바로 이어서 고맙다는 문자가 왔다.
넌 나에게 고맙다고 해야 한다.
내가 친구처럼 죽을병 걸렸다면 나는 치료보다는 죽음을 선택할 것 같다. 접시물에 코 박고 죽던지, 아니면 달리는 차에서 핸들을 놓던지, 죽는 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다.
남자가 여자하고 노는 것만큼 더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다. 여자 싫다고 하는 남자는 없다. 있다면 거짓이다. 여자는···, 여자도 그럴 것이다. 난 여자가 아니라서 여자 맘은 모르겠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남자가 더 심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게 동물의 법칙이다.
수컷과 암컷, 수컷은 정액을 순간적으로 방출하는 거고, 암컷은 그것을 일정 기간 품어야만 한다. 수컷이 바람둥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생존의 법칙이다.
수컷이 암컷 없이 살 수 없는 이유이고, 암컷은 수컷 없어도 살 수 있는 이유이다. 바람둥이가 아닌 수컷은 자신의 욕망을 속이거나, 다른 수컷과의 전투에서 패배자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되는 곳이 암컷을 차지하려 싸우는 수컷들의 전쟁터이다.
사람이 동물보다 더 난 존재일 거라는 것은···, 사람들이 가지는 착각이다. 세상을 거꾸로 보는 사람이다.
인류 역사에서 결혼이란 계약은 일부일처라는 계약으로 진화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제도가 없었다면 혼자 사는 남자들 많을 것이다.
지금의 결혼제도가 나는 맘에 든다. 그 제도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우리는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는다.
사람은 바다 모래알만큼이나 많다.
번뇌는 바다 모래알만큼이나 많다.
사랑은 바다 모래알만큼이나 많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다. 그들이 만들어 낸 사랑 이야기는 아담과 이브로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중에 몇몇이 나의 애인이 되는 것이다.
지질한 남편들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그들의 배우자는 사랑에 배고픈 여자들이다. 신랑에게 위로받지 못하는 여자들이다. 누군가 손잡아주기를 기다리는 여자들이다. 난 그 여자들에게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육체적 즐거움을···, 여자들이 원하는 사랑을 주는 사람이다.
나하고 잘 놀다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는 여자들도 많다. 헤어지자고 하면서 자기를 사랑해 줘서 고맙다고 하기도 하고, 바람난 자기 남편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나는 안다.
나와 헤어지는 명분을 만들 뿐···, 새로운 남자를 찾아가는 거다. 그 마음을 나는 이해한다.
위대한 사랑, 영원한 사랑, 그런 거 없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죽어만 가던 시간에서 여자들은 부활한 것이다. 몸의 즐거움을 안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선택할 것이다.
시간은 돌이킬 수가 없다. 살아있었다는 것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이다. 기억 속에 과거만이···, 내가 그때 그렇게 살았었지, 살아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방편이다.
붉은 커튼 아래 조명 불빛을 받으며 쾌락에 떨었던 몸의 기억은 달콤한 추억이다. 하얀 백자 도자기 같은 여자의 엉덩이를 움켜쥔 손바닥의 감각을 남자라면 누구나가 갖고 있다. 잊지 못할 기억일 것이다. 첫 경험이 될 수도 있고, 강렬한 에로스일 수도 있고, 죽을 것 같은 흥분일 수도 있다.
사랑에 대한 기억은 무엇이 되었든···, 사람 숫자만큼 있는 것이다. 지구에 몇 명이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숫자만큼이다. 다양한 장르의 동영상이 24시간 돌아가고 있다.
늙음이라는 시간, 또는 병이라는 질병은 에로스에 대한 추억을 더 이상 못 만들게 한다. 육체의 망가짐이다. 육체적 결핍이 온 것이다.
친구는 암이라는 병에 비명을 지르고 있다. 죽어가는 몸으로 침대 속에 발가벗고 누워있는 인생이 되었다. 그 친구에게 내가 주인공이 된 동영상을 보낸 것이다.
제주도에 골프 여행을 갔다. 무작정 갔다. 제주에 숙소를 잡아 놓고, 골프 조인을 했다. 뭐가 되려고 그러는지 대전에서 온 40대 후반의 여자 둘하고 나처럼 놀러 온 남자와 조인을 했다.
여자가 치면 나는 굿샷, 나이스 샷을 시원하게 소리 지른다.
여자들이 깔깔 웃는다.
나는 실없는 남자처럼 오두방정 떤다. 나의 말과 몸짓으로 여자들의 혼을 빼놓는다.
옆에 있는 남자는 나를 경멸하는 눈빛이다.
그 남자는 점잖게 말하고 여자에게 관심 없다는 듯 조심조심한다. 골프장에 왔으면 공치는 것에만 집중하자는 눈치를 준다.
난 남자에게 관심 없다. 여자에게만 관심 있다.
어차피 제주도에 공치러 온 것은 골프 실력을 자랑하러 온 것이 아니다. 놀러 온 것이다. 놀러 왔으면 놀아야 한다.
재밌어야 한다.
나는 여자들에게 추파를 던진다.
공치는 거는 핑계다. 공치는 것이 목적이었으면 서울에서 친구들하고 놀지, 여기에 혼자 오지 않는다.
저 남자도 나와 비슷한 이유로 제주에 왔을 것이다.
여자가 날 유혹하겠지, 생각하는 것은 바보 같은 생각이다.
내가 유혹하면, 알면서 모른 척 따라오는 것이 여자의 마음이다. 여자가 유혹하면 알면서 모른 척 내가 따라갈 것이지만, 여자는 먼저 유혹하지 않는다. 먼저 찔러야 하는 것은 남자이다. 암컷과 수컷의 차이이다.
두 여자는 나의 애인이 되었다. 물론 두 여자는 내가 두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는 모른다. 묻지도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두 여자의 문제이다.
나는 동시 패션으로 여자를 만난다.
눈치 빠른 여자들은 나를 몇 번 만나다 보면 나의 이런 습관을 알아차린다. 그런 내가 싫다고 가면 그만이다. 나쁜 남자 컨셉이라 하는데, 난 모르겠다.
나는 늘 사랑을 한다고 생각한다. 여자를 만나면 그 시간에 최선을 다하고, 헤어지면 잊는다.
10명의 바람둥이 남자가 있다면, 바람둥이를 상대할 10명의 여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1:1의 법칙, 일부일처가 적용되지 않는다.
애인이 있는 여자보다 애인 있는 남자가 더 많다. 그렇다면 이쪽 세계에서는 뭐가 되었든 일처다부, 일부다처가 일상이다.
친구들이 내 마누라를 본 것 보다, 내 애인을 더 많이 만나고 인사를 나눈다. 한 여자를 1년 이상 사귀는 경우는 손꼽는다. 헤어지고서도 몇 년 지나서 다시 만나기도 한다.
어쩔 수가 없다.
결혼한 부부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잡을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는 것이다.
오면 오고 가면 가는 거다.
인생이 그런 거다.
계획된 인생대로 살아지는 것 없다.
어느 날 낯선 인생 속에 던져져 사는 것이 인생이다.
친구들은 내 애인을 두 번째 마누라, 세 번째 마누라, 네 번째 마누라로 부르거나, 안양댁, 수원댁, 과천댁, 강남댁 등으로 부른다. 전생에 나라를 구한 놈이라면서 내가 부럽다고 한다.
친구들이 나를 부럽다고 하는 말속에는 내가 한심하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고, 나의 품행이 나쁘다는 뜻도 있다.
난 받아들일 수 없는 친구들의 생각이다.
내가 동영상을 보내준 친구는 다른 친구들과 달랐다. 공부 많이 한 놈이라 똑똑했다.
사람은 본능에 따른 의사결정을 한다고 했다. 선택은 대부분 이성적 사고와 감성적 사고의 중간 어디쯤에서 한다는 것이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은 쾌락이라는 것이다.
쾌락은 지적인 것하고, 감각적인 것이 있는데, 나는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뭔가 그럴싸하게 말해주었다. 지적인 쾌락을 얻고자 책 읽고, 글 쓰고, 그림 그리는 행위가 나쁜 것이 아니듯,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나의 행동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친구 말이 100번 맞다.
난 지적인 깨달음···, 그런 것은 잘 모른다.
지금 즐거우면 되고, 그 즐거움은 대부분 육체적 본능에 따른 것이다. 특히 성적 에너지가 나는 좋다.
쾌락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갈 때의 짜릿함이 좋다. 친구들은 사랑이 아니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사랑이다. 내가 보기에 친구들은 사랑을 모르고 산다.
절정의 순간에 죽고 싶을 정도의 쾌락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을 모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들이 나의 친구들이다.
내가 동영상을 보내준 친구는 나의 욕망을 알고 있다.
친구는 어느 날 말했다.
너 발기 안 되면, 어떻게 할래, 하고 싶은데 못하면 어떡할 거야, 아무리 용을 써도 되지 않으면 어떻게 살 거야,
친구가 웃으면서 말했고, 나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다른 감각으로 사는 거지, 삽입만이 쾌락이 아니거든···. 사정에서 오는 쾌락도 있지만, 눈의 감각, 귀의 감각, 코의 감각, 혀의 감각, 손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쾌락도 있거든.
나를 보는 친구의 눈빛이 변하면서,
존경스럽다고, 장난치듯 말했다.
은밀한 쾌락을 추구하는 그 욕망을 대부분 가면의 껍데기에 덮어 놓고 있다. 난 그 가면을 벗고 살자는 것이다.
친구 장모가 돌아갔다는 문자를 받았다.
동대문 종합시장에서 포목점을 하는 애인과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애인은 북한산 등산하다가 만난 여자이다. 중년의 이쁜 여자가 사촌들과 함께 산에 오르는 중에, 친구들과 함께 하산하는 나와, 약수터 쉼터에서 만났다. 이쁜 여자는 사촌들하고, 나는 친구들하고 수다 떨면서 눈이 몇 번 마주쳤다. 순간적으로 찌르르했다. 20분 정도 하산하다가 뒤돌아서 다시 올라갔다.
약수터에서 나를 본 여자의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뒤늦게 안 것이다. 뛰다시피 올라온 나는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나는 이쁜 여자에게 말을 했다.
말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 당신에게 말을 한마디 건네려고 뛰어왔다고 했다.
사귀자고···, 말했다.
이쁜 여자는 나의 애인이 되었다. 친구들은 나를 괴물로 취급하지만, 아니다, 나는 정상적인 남자이다.
사랑은 체면을 차리면서 하는 거 아니다. 뻔뻔하게 하는 거다.
사랑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하는 거다.
애인을 데리고 장례식장에 갔다. 조문하고 한쪽 구석에 앉아있는 친구들과 밥을 먹었다. 몇몇 친구들이 자리에 앉고, 내 옆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애인이 나의 마누라인 줄 알고 인사를 한다.
제수씨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내 마누라를 본 적이 있는 친구들이 낄낄거린다.
난 가만히 있다가 마누라가 아니라고 했다.
그럼 뭐냐고 한다.
난 애인이라고 말했다. 친구들 몇몇이 기절초풍을 한다.
애인하고 놀고 싶고, 장례식장도 와야 하고, 그러니 어쩌냐, 애인 데리고 여기 와야지···, 내가 말했다.
친구들이 뒤로 자빠지면서 웃고 놀란다. 친구들이 나를 철없는 아이처럼 생각할 것이다. 조금 있다가 나는 장례식장을 나왔고, 애인하고 모텔을 갔다. 오늘은 늦게 들어가도 된다. 장례식장에 온 것이니···.
나는 반도체 도매유통을 하고 있다. 거래처가 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줄지도 않는다. Supplier로부터 물건 받고, Buyer에 넘겨주면 업무 끝이다.
남들은 내가 편하게 돈 번다고 하지만, 웃기는 개소리이다.
이 시스템을 만드느라 밑바닥에서부터 죽기 살기로 일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10년쯤 고생했더니 조직이 일하는 체계가 잡혔다. 내가 월급을 주고, 월급 받은 직원들이 일한다. 직원은 9명이다. 아침 회사에 나가서 11시쯤 되면 할 일이 없다. 상무에게 보고 받고, 지시하면 나의 업무는 끝난다.
오전에 업무를 마친 나는 도산대로 학동사거리에 있는 스포츠 센터로 가서 운동한다. 연예인들이 많이 오는 곳이다. 골프 월례회에 20팀이 나간다. 나는 골프회의 회장이 되어 회원들과 어울린다.
평소에는 나의 귀가 시간은 저녁 7시이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늦는 경우가 있지만, 밤 11시를 넘기지 않는다. 애인은 낮에 만나서 저녁까지 논다.
친구들은 내가 5명의 여자를 만난다고 하면 놀란다. 가능하냐고 한다. 5명을 만나는 이유는 하나이다.
애인이 한 명 있었을 때, 여자에게 전화했었다. 여자는 선약이 있다고 했다. 다른 약속이 있어서 만날 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때 알았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한 명을 더 만들었어야 했다. 그런 이유로 두 명이 세 명이 된 것이고, 그렇게 하다 보니 5명이 된 것이다. 헷갈리면 안 되기 때문에, 똑같은 가방을 5개 사서 선물한 적도 있다.
저녁 6시쯤 나는 마누라에게 전화한다.
저녁을 집에서 먹을지 아닌지를 알려 주는 것이다.
나는 마누라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 거의 없다. 나는 내가 지닌 남자의 힘을 집에서는 발휘하지 않는다. 조용한 남자, 있는 듯 없는 듯 가만히 있다. 마누라에게 ‘왜’라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 ‘그랬구나’라는 말을 주로 한다. 50살을 넘으면서 갱년기가 온 마누라는 잠자리가 불편하다면서 각방을 쓰자고 하였다. 마누라에게 나는 신뢰와 복종을 보여준다.
일요일에는 마누라와 함께 교회에 간다. 성경 말씀에 따라 사는 마누라는 인간의 욕망을 죄악시하고 신에게 순종하는 사람이다. 종교에 가스라이팅 당한 마누라였다.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거룩한 삶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수녀원에 있어야 할 여자였다.
인생의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들은 종교에 귀의하고, 삶에 허기를 느낀 사람들이 영원한 사랑에 매달려 사는 것 같다.
교회에서 3일 일정으로 ‘아버지 교회’라는 행사를 한 적이 있었다. 마지막 날에는 세족식이 있었다. 나는 마누라의 발 앞에 무릎 꿇고 공손하게 두 손으로 씻겨주었다.
마누라는 울먹이는 소리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나를 사랑한다고 하였다.
밤이면 낮이 그립고, 낮이면 밤이 그리운 것이 사람 마음이다. 사랑에 빠졌다가 사랑에 버림을 받으면 고독한 것은 당연한 거다. 고독하다는 생각이 있으면 다른 사랑을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고독한 게 싫어서 사랑을 끊어지지 않게 병렬 사랑을 하는 거다. 남녀 관계에 직렬 사랑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이다.
좌뇌, 우뇌 이야기하면서 여자는 일을 동시에 할 수 있지만, 남자는 하나밖에 못 한다는 말이 있다. 웃기는 말장난이다. 남자 여자 차이가 아니라 사람 차이이다. 사랑도 그런 것이다.
친구로부터 문자가 왔다. 항암이 끝나고 퇴원하였으니 놀자고 한다. 한 달 뒤에 친구와 말레이시아에 갔다. 골프 여행을 간 것이다. 스포츠 센터에서 알고 지내던 40대 여자 둘을 데리고 갔다. 애인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서로가 적정한 선에서 선을 넘고 있지 않다.
하루가 끝나갈 무렵, 호텔 레스토랑 테라스에서 스위트한 레드와인을 마시는 중이다.
평화로운 거리에···, 석양이 내려앉는다.
여름 하늘이 붉은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친구와 나는 골프장과 쇼핑몰에서 장난치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두 여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나하고 친구가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애매한 모습을 취하자 여자가 허리를 세우고 앞으로 몸을 내민다. 붉은 포도주가 들어있는 잔을 들면서 말한다.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몸,
아끼면 뭐 해,
오늘 밤을 불살라야지,
오빠들 술 마셔,
오늘 밤 뭐할 거야, 밤새야지, 농담처럼 말한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붉은 포도주를 핥아대는 여자의 입술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썩어 문드러질 몸, 오늘 밤을···, 나와 친구를 여자들이 유혹하는 말이다. 나는 유혹에 못 이기는 척하고, 10분 정도 지나서 여자 손 잡고 일어난다. 내가 일어나고 나면, 친구는 다른 여자 손을 잡고 일어날 것이다.
유혹은 늘 우리 곁에 있다.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을 받은 것은 뱀이 아담과 이브 곁에 늘 있었기 때문이다. 뱀과 인간이 함께 살던 에덴동산이었다. 유혹을 받은 이브가 나쁜 여자가 아니라, 이브 곁에 뱀을 만들어 놓은 하나님이 잘못한 것이고, 에덴동산에 한입 베어 물고 싶은 사과를 심어 놓은 것이 잘못이다.
뱀은 사탄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아담은 이브를 사랑한 죄 밖에 없다.
이브는 함께 놀던 뱀을 믿은 죄 밖에 없다.
눈앞에 있는 사과를 먹고 싶어 먹었을 뿐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져서 그렇게 살았다면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게 나쁜 거라면, 남자만 있는 세상을 만들던지, 여자만 있는 세상을 만들던지, 아니면 암수 구분 없이 천사들만 있는 세상을 만들었어야 했다.
나는 이브를 사랑하는 아담으로 살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마누라가 성경책 읽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어 은혜로운 시간을 보냈다고 문자가 왔다. 성경 구절도 같이 보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로다.」
나처럼 좋은 남자를 만나서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이 자기의 복이고, 하나님의 보살핌이라고 한다.
그 문자를 보고, 각방 쓴지가 언제인데···, 속으로 생각했다. 부부라고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마누라이다. 마누라가 부부라고 하기 때문에···, 부부가 된 것이다.
침대 옆에 누워있는 여자는 나의 손을 잡고 나를 상냥한 미소로 쳐다보고 있다. 오늘 놀기 좋다면서 일어나 아침 먹자고 한다. 그리고는 어젯밤에 헤어진 친구에게 전화한다. 호텔 식당에서 만나자고 한다. 여자는 즐거운 듯이 나에게 말을 한다. 나도 즐겁게 대답한다.
태어났으면 어떡하든 죽는 날까지 살아야 하고, 결혼했으면 어떡하든 이혼하는 날까지 살아야 한다. 증오심으로 숨이 넘어 갈듯 인생을 살 필요 없다. ‘인간살이’ 하는 노릇에 즐거움을 빼면 고통만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살 이유를 난 찾지 못했다.
내가 내 얼굴에 침 뱉고 사는 이유는 하나이다.
즐겁게 사는 거, 그거뿐이다. 바보 같은 인생이 재미난 인생이다.
난 여자하고 노는 게 좋다.
사랑은 유한한 것이고, 생존의 법칙이 그 기한을 결정하는 것이다. 자꾸 딴 이야기 하면 피곤할 뿐이다.
나를 숨기고 살지 않는다.
난 내일 죽는다고 해도 아쉬워할 놈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