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을 선물 받았으니, 늦지 말고 7시 정각에 도착하고 전화 줘, 하는 문자가 왔다. 마누라 퇴근 시간, 아니 딱히 퇴근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라고 하는 그 시간에 맞추어 일하는 건물 앞에 차 대어 놓는 것이다.
마누라, 나하고 햇수로는 29년을 같이 사는 거다.
큰딸이 중학교 3학년, 작은딸이 중학교 1학년 때, 살기 힘들다며 이혼해 달라고 하는데 딱히 이유가 없었다. 이상하고 낯선 차가움이 마누라에게 있었다. 마누라 얼굴에서 어떤 대답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바람난 것도 아니고,
도박하는 것도 아니고,
술을 좋아하지도 않으니,
딱히 나에게는 이혼 사유가 없다. 아들 삼 형제 중에 막내라서 시댁과의 갈등도 딱히 없다. 수원에 있는 부모님 집은 명절날 가는 것 외에는 가는 일도 없다. 남들 받는 만큼 월급을 받으니, 월급을 또박또박 갖다주고, 딱히 용돈이라고 할 것도 없는 돈을 용돈으로 마누라한테 받았었다.
‘이렇게 살기 싫어, 이혼해 줘’ 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살고 싶은 건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말이 없다. 그냥 싫다고 한다. 이혼 안 해주면, 그냥 집을 나가고 싶다고 한다. 아이는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모르겠다고 한다. 아이들하고 사는 것은 나더러 알아서 하라고 한다.
우울증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여 병원을 가보자고 하였더니, 정신병자 취급하지 말라며 조곤조곤히 앉아서 말을 한다.
아이들 의견을 들어야 했다. 아이들에게 엄마의 상황을 말해주었다. 아이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하는 듯한 눈치였다. 하긴 나도 이해 못 하는데 사춘기 아이들이 이해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아이들은 이혼하지 말고, 엄마가 집 나가서 혼자 살 수 있도록 해주자고 한다.
마누라는 주말에만 집에 온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일찍 집을 나간다.
주말 부부가 된 것이다.
마누라가 있는 곳은 우이동 계곡에 있는 정신 수련회이다. 어떤 스님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고···, 단전 호흡과 명상, 그리고 기체조를 통해서 정신과 육체를 다스리는 곳이라고 한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곳을 이용한다. 암 환자, 청소년들, 직장인들, 주부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명상 프로그램을 이용한다.
마누라는 월요일 아침에 가서 금요일 저녁까지 그곳에서 일한다. 일한다고 하지만, 월급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무료봉사라고 한다. 숙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따로 급여가 없다고 한다.
마누라가 그렇게 말을 한다.
자기 쓸 돈이 없으니 용돈을 달라고 해서 한 달에 70만 원씩 마누라 통장에 자동이체를 하였다.
13년이란 시간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흘렀다.
나의 시간과 마누라의 시간은 서로 다른 곳으로 흘러간 시간이다. 나의 시간이 인내의 시간이었다면, 마누라의 시간은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나에게 번뇌의 시간이었듯이 마누라에게도 번뇌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업을 쌓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우리 부부는 같은 업을 쌓고 있지 않다. 전생의 어떤 업(業)이 있어 현생의 이런 업(業)으로 사는지 모르겠다. 부부이지만 부부라는 인연이 아니다.
10대 소녀인 아이들 양육비, 생활비 등 모든 비용은 내가 받는 월급으로 해결해야 했었다. 금전적인 것만이 아니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등등 모두가 나의 몫이었다. 힘들지는 않았다. 전기밥솥이 밥하고, 세탁기가 빨래하고, 청소기를 들고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집안일이라는 것이 미루고 한 번에 처리하면 일이지만, 바로바로 정리하면 힘든 일이 아니었다. 가장 힘든 것은 밥상 차려 아이들 먹이는 거였다. 하지만 아이들이 엄마의 부재를 알고서는 자기들이 스스로 차려 먹고 치우는 버릇이 생기었다. 딸들이라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마누라는 금요일 밤에 와서 TV 보고, 토요일에 아이들하고 산책하고, 외식하고, 집에 와서 수다 떨고, 자고, 일요일 점심을 아이들에게 차려 준다. 토요일 저녁은 외식, 일요일 점심은 엄마가 차리는 밥상이다. 루틴이 되었다. 아이들은 엄마라는 존재감 때문에 그런 것인지 수다를 같이 떨지만, 개인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 같지는 않다. 연예인 이야기 하고, 방송 프로그램 보면서 수다를 떠드는 정도인 것 같다. 아이들 인식에는 엄마가 우울증 걸린 사람 정도로 보고 있다. 아이들은 눈에는 자기들 엄마가 그런 엄마였다.
나하고 각방을 쓴 지는 벌써 15년이 되었다. 부부관계를 한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없다. 아이들이 없을 때 어쩌다가 분위기도 전환할 겸 몸에 손을 대었더니 노발대발하면서 왜 그러냐고 하는데 눈빛이 무서웠다.
집에 있을 때도 나하고는 그다지 대화가 없다. 중단된 대화를 다시 시작하기는 어렵다. 마누라가 말을 나누는 것은 두 딸하고이다. 나하고는 단답형 대화이다. 큰아이는 대학 졸업해서 직장 다니고, 작은 아이는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마누라는 무엇에 포로가 되어 사는 것인지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내가 뭐라고 한마디 하면 싸움이 되고, 다툼이 되어 주말에 집을 오지 않는다.
내가 잘못한 게 무엇인지 말해달라고 하면, 잘못한 것 없다고 한다. 그냥 싫다고 한다. 답은 정해져 있는데 왜 자꾸만 자기를 힘들게 하냐고 한다.
짜증도 내고, 화도 내 보았지만, 이혼해 줘 한 마디로 나의 입을 닫게 한다. 이혼해 주던지, 아니면 참고 살던지 나에게 그런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마누라가 듣기 싫은 말, 마누라에게 상처가 되는 말, 마누라가 오해할 만한 말이 뭔지 나는 모른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마누라를 화나게 하느니,
차라리 침묵을 택하였다.
세상을 모두 이해하고 살 수는 없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반듯하게 잘 컸다. 문제를 일으킨 적이 한 번도 없이, 장학금 받으면서 대학을 다녔다. 아이들이 대학에 입학하고는 엄마에 대한 기대가 없어진 듯하다. 언제부터인가, 큰딸은 마누라가 오는 금요일이면 연세대 대학원에 다니는 남자친구를 만나러 간다. 남자친구는 박사과정에 있다. 신촌에 방을 얻어 혼자 자취하고 있다. 남자친구 집에서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에 온다. 나는 딸아이에게 네가 판단하여 선택한 일이고, 그것이 너를 행복하게 하는 거라면, 아빠로는 무조건 네 의견을 존중하고, 나의 딸을 믿는다고 하였다. 큰아이가 나의 말을 듣고 눈물을 보여주는데, 그 눈물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집은 삭막한 공간이 되어 버렸다. 아이들이 집에 없는 그런 날 마누라는 집에서 잠만 잔다.
사람은 감정적인 동물이다. 감정에 빠지다 보면 고독한 시간을 보내고, 고독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시간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마누라와 나는 그렇게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나는 50대 후반, 관자놀이 부근에는 흰머리 가득하고 잔주름이 얼굴에 생기는 슬픈 얼굴의 늙은이가 되었다.
뜨거운 열기에 심장의 펌프질을 주체하지 못하던 젊음이 있었다. 그 젊은 시절에 마누라가 내 앞에 나타났다. 사랑이 귓가를 스쳐 다가왔고 심장의 두근거림이 있었다.
누군가가 그리워 함께 있고 싶다면 사랑이라고···,
연애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확신했고,
마누라도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결혼했다.
마누라는 나만의 여인이 되었다.
나는 마누라만의 남자가 되었다.
결혼 전에 대화하면서 알았던 상대의 기질과 천성은, 부부라는 생활 속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서로가 살아온 내력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나의 시간을 여인에 맞추어 사랑했다.
내 인생을 사랑하면서 살았다.
내 할 일, 내 도리, 사람이 할 도리라는 것에 맞추어 살았다.
사람이 살아가는 규칙이 있다면, 나는 그 규칙을 따른 사람이다. 회사와 집, 그리고 집에서 회사를 아침저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인생이다. 친구들이 좀팽이니, 고지식하니, 뭐라 하여도 나는 나의 삶을 살았다.
아들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 내가 살아온 성실한 흔적에 잘못된 흠이 있다면 새털처럼 가벼울 것이다.
친구들은 깊은 흠을 간직하고도 당당하게 살고 있다.
나도 안다.
내 주위의 남자들, 아들이 아닌 모습으로, 아버지가 아닌 모습으로, 남편이 아닌 모습으로 살지만 큰소리치면서 산다.
나도 안다.
나도 눈이 있어 친구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모르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비겁하게 보였다.
나는 가끔 내가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데 나만의 섬에 내가 혼자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섬이다.
나라고 하는 섬이다.
내 주위의 사람들은 내가 행복한 가정생활을 한다고 생각한다.
친구들이 보는 나의 이미지는 딸과 마누라밖에 모르는 성실한 남자이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나를 모른다. 사실을 숨기고 사는 것이 힘에 부칠 때가 있다.
나의 마누라 이야기를, 아니 우리 부부의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할 때가 있다. 물론 입이 무거운 세 놈에게만 하는 것이다.
어리둥절하여 소리치는 놈, 너 뭐냐고 화내는 놈, 왜 그렇게 사냐고 인생 상담하자면서 덤비는 놈들이다. 친구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 세상에 돈 안 받고 일하는 그런 곳이 어디 있냐, 네 마누라 두 집 살림하는 거 아니냐, 딴 남자 만나고 있는 것 같다, 와 같은 말들이다. 대부분 나를 어이없다는 듯이 본다.
네 인생이니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만, 이혼해서 혼자 재미있게 살라며 친구들은 나를 훈계한다, 아니 나를 위로한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을 내가 못 보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마누라가 보는 세상과 내가 보는 세상이 다르다는 것은 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차에 앉아 듣는다. 마누라가 과일 바구니를 두 손으로 힘들게 들고 걸어 나오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우산을 들고 차에서 내려 마누라에게 뛰어간다.
상당히 비싸 보이는 과일 바구니이다. 과일이 꽤 담겨 있다. 과일을 받아 뒷좌석에 놓고 차에 싣는다. 과일 바구니를 선물 준 사람은 누구일까?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지만, 물어보면 인상을 쓸 것이다.
집으로 간다.
운전하는 동안에 우리 두 사람은 말이 없다. 옆 눈으로 흘긋 마누라를 보지만, 마누라는 고개 돌려 오른쪽 백미러 보면서 생각에 잠겨있다. 표정을 알기 어렵다.
차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라디오를 튼다. 차에서는 김창완의 ‘청춘’이 흘러나온다. 몇 년 전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로 다시 유행을 타기 시작하였다. 방송에 종종 들리는 노래였다.
바짝 마른 갈바람 같은 침묵이 우리에게 있다. 침묵 이외의 것이 있다면 비장한 대화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집으로 가는 길이 멀다.
운전하는 시간이 억겁(億劫)이다.
집에 오자마자 마누라는 작은 방으로 들어간다. 난 주방으로 가서 과일을 씻는다. 선물이라 그런가, 과일이 크고 먹음직스럽다. 깨끗하게 씻은 과일을 냉장고에 넣는다. 그리고 안방에 들어온다. 잠시 뒤 마누라가 거실에서 TV를 틀고, 방송에서 나오는 소리를 나는 누워서 조용히 듣는다.
나는 잠이 든다.
두런두런 소리가 거실에서 들린다. 작은 애가 왔나 보다.
시계를 보니 밤 2시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소리에 민감해진다. 캄캄한 방 안에서 나는 누워있다. 큰 애 목소리도 들린다. 큰 애가 남자친구 집에 안 가고 집에 있다니, 오늘은 무슨 날인가?
눈을 감지만 잠이 올 리가 없다.
고인 눈물이 흘러내릴 듯하다. 긴 숨소리에 깊은 한숨이 밤의 악마를 불러낸다. 악마는 나의 목을 잡고 누른다. 뜬 눈으로 가위에 눌리는 밤이다.
내가 짊어진 삶의 배낭에는 마누라가 들어있다.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조는 듯한 하룻밤을 보낸다. 새벽에 감았던 눈을 뜨고 살그머니 주방에 나간다.
빈 그릇들과 술잔, 과일 껍질, 빈 맥주병들이 보인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소리 안 나게 거실을 정리한다.
냉장고에서 김치 몇 조각을 꺼내어 큰 접시 한 귀퉁이에 놓는다. 밥통에서 밥을 한 주걱 퍼서 김치 옆에 놓는다. 달걀 하나 꺼내어 후라이한다. 밥 위에 올려놓는다. 고추장을 한 숟가락 퍼서 접시에 덜어놓는다. 접시를 한 손에 들고 소파에 앉는다.
아침을 먹는다.
두 딸과 마누라가 잠자는 아침이다. 아니 깨어 있을 수도 있다. 내가 밥 먹는 소리가 들릴 수도 있고, 안 들릴 수도 있다.
접시 위에 차려진 음식을 동굴 같은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다.
텁수룩한 흰머리를 손가락으로 두어 번 만지고, 구겨진 옷을 입고 잿빛 수염이 얼굴에 가득한 나는 집을 나온다. 코끝에서 콧물이 나온다.
주말에는 아르바이트한다. 주말만 이른 새벽에 가서 화장실 및 건물 계단을 청소한다. 한 달에 80만 원 받는다. 마누라 용돈이다.
4년 전 회사에서 권고사직 받았다. 직업이 3가지가 생기었다. 주중에 하는 일, 주말에 하는 일, 그리고 가끔은 한밤중에 대리 기사로도 일한다.
아이들 결혼자금을 만들려면 돈을 모아야 한다. 내가 굳건히 버티고 앉아 지켜야 할 자리, 가장이라는 역할에서 벗어나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나는 소외된 아버지였고, 쫓겨난 남편이었다. 공허한 남자가 된 것이다.
벌거벗은 시간을 본다.
나는 나에게 괜찮나 묻는다.
나는 나에게 괜찮다고 답한다.
모호한 대답인지 알고 있다.
거칠고 금이 많이 간 채로 내면이 죽어가는 인생이다.
나는 나의 하루하루를 죽이고 있는 살인자가 되었다.
내 삶이 진저리가 난다고 생각이 들면서 황혼이혼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이혼해서 혼자 살아볼까,
이미 늙었지만···,
황혼이혼을 많이 한다고 하는데···,
살아볼 수 있다면, 그렇게 살아볼까···,
그렇게 살아간다고 해서 지금과 다른 게 있나 싶다. 어차피 혼자인데···, 이래도 혼자, 저래도 혼자, 젊었을 때 이혼 못 했는데, 굳이···.
사라진 시간 속에 시들어 버린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
나는 이렇게 늙어가고 있다. 갈증이 온다. 죽음에 대한 갈증이다. 아버지가 나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이 있다. 남자가 가정을 꾸렸으면 자기 할 도리는 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