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장편소설, 부부
한 달에 한 번씩 고등학교 동창 6명이 모여서 골프 친다. 친구들은 의사, 삼성증권 지점장, 공기업 본부장, 벤처기업 대표, 프랜차이즈사업 대표이다.
친구 부부가 여행을 왔다. 여행을 온 친구는 대한민국 국민이면 다 아는 OO 떡볶이 브랜드를 만든 친구이다. 나는 제주도에 살고 있다. 친구들과의 골프 월례회가 있으면 난 서울에 올라간다.
친구의 애인이 자기 친구를 데리고 온다. 여자 2명에 남자 6명이 노는 것이다.
가끔 일 관계로 골프 모임에 오지 못하는 친구가 있다. 그러면 부족한 인원은 여자로 채워진다. 친구 애인이 자기 친구를 한 명 더 데리고 오는 것이다.
친구는 제주에 오기 전에, 6명이 한 달에 한 번씩 골프 치고 노는 것, 집사람한테 비밀로 해달라고 전화했다.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왜, 그것을 비밀로 하지, 전화를 끊고 나서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친구 부부를 만났다.
아침에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친구 마누라와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하얀 피부에 자그마한 체구, 우아하게 나이 든 중년의 여자였다. 비밀을 간직한 듯한 목에는 가느다란 금 체인으로 연결된 목걸이가 반짝 빛을 내며 보인다. 단아하게 정리된 검은색의 머리는 윤이 났다. 요즘 50대 중반이면 중년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는가, 생각한다. 고령화 시대라고 하니 중년, 장년, 노년의 구분을 모르겠다.
내 차로 산록 도로에 있는 핀크스 CC 이동하였다. 봄이 끝나갈 무렵이라 카트 도로에 있는 유채꽃들이 지고 있다. 구름이 있지만 제주답지 않게 가벼운 바람이 불고 있다.
라운딩하면서 친구는 남편이라는 계급장을 단 특유의 무뚝뚝함으로 마누라를 대한다. 내 눈에 조금 거슬렸다. 나는 친구가 서울에서 애인하고 어떻게 노는지 알기 때문이다.
친구 마누라는 친구에게 농을 던지면서 애교스럽게 행동한다. 공이 안 맞으면, ‘아잉’ 하면서 친구를 보고 팔짝팔짝 뛰는데,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가 보였다가 사라진다. 도톰한 입술에 있는 잔주름이 요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고난 애교이다.
마누라 잘 얻었네, 하고 속으로 생각한다.
나는 친구 마누라 보고는 싱긋 웃는다.
친구 마누라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는다.
옆에서 친구는, 너무 빨랐어, 몸이 돌았어, 힘이 들어갔어, 등의 말을 자기 마누라에게 툭 하고 던진다.
친구 마누라는, 기분 나쁘다는 듯 눈을 찡그리며 눈으로 자기 신랑을 가리키면서, 나를 쳐다보고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자식이 좀 다정다감하게 말해주지,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친구 마누라는 나의 파트너와도 수다 떨면서 제주 생활이 어떤지 묻는다. 친구가 나의 파트너를 자기 마누라에게 어떻게 소개했는지 모르겠다.
친구는 내가 데리고 온 파트너가 애인이냐고 묻는다.
아직 아니라고 했다.
나의 파트너는 부산에서 제주로 1년 살이 하러 왔다가 지금 3년째 사는 분이다. 나보다 두 살이 더 많다. 혼자 사는 여자이다. 큰딸은 LG에 다니고, 작은딸은 삼성에 다니고 있다. 자갈치 시장 입구에 건물을 가지고 있어 재력이 있는 여자이다. 나하고 안 지는 벌써 1년 5개월쯤 되었지만, 애인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아닌 사람이다.
난 애인이라고 한다면 육체적 교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없다. 아니다. 육체적 교감이 없어도 애인인가. 어쨌든 우리 둘은 부부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자연스럽게 서로를 챙겨준다.
친구는 자수성가한 놈이다. 마포에 5층짜리 사옥도 있다. 그늘집에서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 물어보았다.
친구가 대학 졸업하고 롯데백화점 경영기획실에 입사하였는데, 그때 같이 일했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계산해 보니, 27년이란 시간을 같이 보낸 것이다.
제주에 부부가 같이 공치러 온 것 보니, 금실이 좋은 것 같다고 내가 말했다.
그랬더니, 친구 마누라가 웃는다.
우리 금실 좋아, 우리 각방 쓴 지 오래됐잖아, 라고 친구 보면서 묻더니, 나를 보고는 쇼 윈도우 부부인데···, 말한다. 얼굴에 그늘이 보였다 사라진다.
사업을 하는 친구라서 집에 소홀할 거라고 내가 말한다.
사업하는 남자는 자상한 남편, 가정적인 아빠가 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늘 일에 시달리고, 저녁 약속 잡아야 하고, 주말에는 접대골프 쳐야 하고···, 그런 것 보면 친구는 술 먹고 다니지도 않고, 도박도 안 하고, 여자 만나고 다니지도 않고, 교회 열심이고···, 자기 관리 잘하는 거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친구가 테이블에 있는 맥주잔을 들고 마시면서 빙그레 웃는다. 나는, 서울 올라가면 술이나 한자 사라고 속으로 생각한다.
친구 마누라가, 지금까지 살면서 이 남자 속 썩인 적은 없죠, 그거는 인정해요, 그리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요일마다 교회 나가기는 하지만, 신앙심은 없다고 한다. 취미로 다니는 거라 말한다.
왜 그렇냐고 내가 물었더니,
심심해서요 라고 친구 마누라가 대답한다.
애들도 다 커서 자기들 생활에 바쁘고, 친구는 사업한다면서 얼굴 보기 힘들고, 자기는 혼자서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에 코드가 맞는 비슷한 또래들과 커피 마시고, 브런치 먹으면서 어울려 다닌다는 것이다.
자기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동호회 같은 거란다.
친구 부부는 서울로 올라갔다. 삼일 정도 지났는데, 친구가 전화가 왔다. 이번에 공치러 올라올 거냐고 묻는다.
올라간다고 했더니, 자기가 마누라하고 제주도에서 공친 것은 모임에서 알면 안 된다고, 절대 비밀이라고, 신신당부한다.
알았다고 했다.
이천에 있는 블랙스톤 CC에 모였다.
남자 6명에 여자 2명이다. 나하고 친구, 친구 애인하고, 애인이 데려온 여자, 이렇게 한 팀이 되었다.
내가 보기에는, 애인이라는 여자는 친구 마누라보다 미모가 떨어진다. 하지만 목소리도 약간 허스키한 게 묘한 매력이 있는 여자이다. 체구는 비슷하게 아담한 체격이다.
드라이버 거리를 170m 보내고 있다. 땅콩이라는 별명을 얻은 프로선수 김미현이 생각났다. 아이언 치는 자세를 보면 두 발이 잔디에 박혀 있는 기둥처럼 보인다. 짧은 치마에 보이는 허벅지가 탄탄하다.
나긋나긋한 여성미로 본다면 마누라가 훨씬 매력적이다.
애교스러움도 마누라가 더 많다.
친구는 예상했던 대로, 제주에서 마누라에게 보여주었던 행동과 전혀 다르다. 친구는 애인에 대한 배려가 흘러넘친다. 사랑에 빠진 남자의 모습이다. 하지만 친구 애인은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게 친구에게 말한다. 친구가 하는 행동이나 말이 맘에 안 들면 바로 뭐라고 말한다. 여자지만 강한 카리스마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친구는 미안하다고 알았다고 쩔쩔맨다.
애인이 아니라, 부부라고 생각한다면, 꽉 쥐여사는 남자의 모습이다. 친구에게 저런 모습이 있다는 것이 의외였다. 제주에서 자기 마누라가 보여주었던 모습을 친구는 애인에게 하는 것이다.
친구 애인은 이혼한 여자였다.
친구 애인이 데리고 온 여자는 나하고 세 번째 공치는 거다. 투자 컨설팅 사업을 하는, 자기 일을 똑 부러지게 하는 하얀 피부의 통통한 여자이다.
친구가 나에게 사귀고 싶으면 대시하라고 말한다.
나는 싫다고 했다. 딴 놈에게 소개해주라고 말했다.
저 여자는 나에게 관심이 있다고 친구가 말한다.
나는 기가 센 여자는 싫다고 친구에게 말한다.
그늘 집에서 나와서 후반전 라운딩한다. 여자가 내 곁에서 살살 불어오는 맞바람을 맞으며 같이 걷는다.
자기 친구와 내 친구가 서로 사귀는 것이 보기 좋지 않냐고 말한다.
친구는 자기 마누라하고 공친 것을, 자기 애인이게 비밀로 해 달라고 나에게 말했었다. 물론 마누라에게도 애인하고 노는 것을, 비밀로 해 달라고 했다.
내가 느끼기에는 마누라하고 공친 것을 애인에게 비밀로 해 달라는 것이, 더 크게 느껴졌다. 두 개의 비밀이 있지만 하나의 비밀이 강도가 더 센 비밀이었다.
마누라보다는 애인을 더 챙긴다는 것,
아니 무서워한다는 것,
아니 더 사랑한다는 건가, 내 생각이 왔다 갔다 한다.
제주에 언제 가냐고, 옆에서 같이 걷고 있는 통통한 여자가 묻는다.
서울에 왔으니, 2-3일 정도 사람들을 만나고 내려갈 거라 했다.
제주 가기 전에 한번 볼 수 있냐고 묻는다.
나는 좋다고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내일 저녁에 보자고 여자가 말한다.
나는 좋다고 대답하였다.
늦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다.
어제 친구들과 공치고 놀았고, 지금 분당 율동 공원이 내려 보이는 산자락을 걷는다. 블루 블라우스와 아이보리 롱스커트 입은 여자가 내 팔 잡고 주차장에서 카페까지 이어지는 언덕길을 오른다. 사찰이 보이고, 사찰 앞에 전통 찻집에 있다.
문 열고 들어가니, 쌍화탕인지 뭔지 비슷한 냄새가 코끝에 훅 들어온다. 예스러운 테이블과 찻잔, 그리고 갖가지 화병과 액자들···, 약초 향이 묻어나는 찻집이다. 말린 꽃잎들이 벽에 보인다. 벽 구석에 있는 음향기기에서는 녹음된 반야심경이 나오고 있다.
와, 불경이네, 여자가 말한다.
반야심경이라고 말했다.
‘조견오온개공도일체고액사리자색불이공공불이색색즉시공공즉시색수상행식역부여시
··········,
시고공중무색무수상행시무안이비설실의무색성향미촉법
··········’
심무가애무가애고무유공포원리전도몽상구경열반
··········’
나는 조용히 눈 감고 흘러나오는 반야심경을 들릴 듯 말듯 따라 한다. 여자는 찻잔을 두 손으로 들고 염불하는 나를 본다.
전통 쌍화차를 마신다.
눈빛에는 호기심이 가득하다.
찻잔의 닿는 여자의 입술이 내 눈에 들어온다.
반야심경을 다 외워요, 라고 다정한 침묵 속에서 묻는다.
예의 바른 몸짓, 조용조용한 말투,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에는 숨겨진 욕망이 있다. 눈웃음을 치고, 분홍 립스틱 바른 입술 사리로 살짝 내밀었다가 사라지는 혀끝은 타고난 애교이다.
죽을 때까지 비밀이라고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부끄러운 듯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알았다고 말한다.
27년을 같이 산 부부는 형식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빼고 남은 것이 없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부부, 헐렁헐렁한 인생길이 되어버려 아무에게도 실상을 털어놓을 수 없는 쇼윈도우 부부라는 환영에 사로잡혀 살아온 여자이다.
비밀은 비밀이라고 하면 비밀이 되는 것이다. 인생이 예상했던 대로 흘러갈 거라고, 생각한다면 철없는 생각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고 반야심경은 허공 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