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1부
서울로 올라온 지 벌써 2년째다. 천호동의 다세대 주택 2층에 혼자 산다. 아들은 고3이 되었고, 남편은 여전히 S중공업의 전무이사로 있다. 겉보기에 아무 일도 없었던 가정이었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목사인 오빠와 장로인 아버지 아래서 자라온 나는 성경 말씀대로 신랑을 주님처럼 섬기며 살았다.
그는 항상 바빴다. 결혼하고 바로 아이가 생기고, 그 해 겨울 그는 미주 지역으로 발령을 받았다. 3년 후 귀국한 지 4개월 만에 또 유럽으로 떠났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남편이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을 거라 믿었다. 그의 비서였던 김 비서가 함께 떠났다는 소식에도, 나는 믿음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남편은 조직 내 최연소 임원으로, 세계를 누비며 일했다. 우리 부부가 한 방에서 지낸 날은 18년 동안 채 3년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빈자리를 메운 건 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남편과 함께 하는 날에는 여름엔 냉장고에서 꺼낸 물수건을 건네고, 겨울엔 따뜻하게 데운 속옷을 챙겼다. 숟가락을 들면 반찬을 올려주는 정성, 그것이 남편에 대한 내 사랑의 방식이었다. 나는 아내였고, 믿음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김 비서의 눈물 어린 고백은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사모님, 죄송합니다.” 그녀는 이제 35살, 남편과는 20살 차이였다. 다섯 살 아이가 있다는 사실은 내 숨을 멎게 했다. 내가 10년 넘게 몰랐다는 사실이, 그 모든 시간 동안 순진하게 믿고 살아왔다는 사실이 나를 무너뜨렸다.
나는 몰랐다. 아들이 열일곱이니, 그 아이와는 겨우 열두 살 차이다. 내 아들에게 배다른 동생이 있는 것이다. 나는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왔다.
믿음은, 나를 지탱해주던 등불이었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떠날 수 없었다. 실로암 교회라는 조용한 교회에서 간사로 봉사하며 지냈다. 버려진 노인들을 돌보는 그곳에서, 나는 남편의 무게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또 다른 길 위의 나그네를 만났다.
2부
그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셋째 주 토요일마다 봉사하러 오는 단체의 일원으로, 나는 그를 처음 보았다. 버려진 노인들을 목욕시키는 일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고된 일이었다. 기저귀를 갈고, 헝겊으로 덮인 뼈마른 몸을 씻겨낼 때마다, 코끝엔 지린내가 맴돌았다. 여름이면 악취는 배로 심해졌다.
그는 말없이 묵묵히 일했다. 남들처럼 오지랖 넓게 자기 이야기를 떠벌리지 않았고, 오직 그날의 일에 집중했다. 나는 그의 그 침묵이 오히려 편안했다. 말 없는 그의 존재가 하루의 끝에서 따뜻한 휴식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 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저녁 같이 하실래요?" 내가 먼저 물었다. 나보다 열 살 어린 그 남자. 봉사하는 사람이라면 나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그리고 어쩌면, 그의 조용한 눈빛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밥보단 술이 좋다고 했다. 나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지만, 그날은 잔을 들었다. 그는 소주를 두 병이나 마셨고, 나는 겨우 서너 잔.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묘하게도 따뜻하고 날카로웠다. “누님, 이혼하지 마세요. 참으세요. 누님 같은 분은 요즘 세상에 귀합니다.”
그 말에, 웃음이 나면서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도 모르게 그를 응시했다. 한참을 쳐다보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 결혼했어요?”
그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예... 하지만, 혼자예요. 마누라는 없어요. 오래전 사고로 죽었어요.”
그의 이야기엔 긴 슬픔이 묻어 있었다. 유치원에 막 들어간 아들과 함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그의 아내. 그날 이후 그는 무너졌고, 병원과 기도원, 상담실을 오가며 겨우 하루를 살아냈다고 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조용히 가까워졌다. 말 없는 그의 손끝, 무심히 건네는 커피 한 잔, 손을 스치듯 잡아주는 순간들. 나는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오히려 기도보다 더 깊은 위안이라는 걸 느꼈다.
“누님, 우리는 둘 다 나그네요. 나그네는 길에서 쉰다고 했잖아요.” 그의 말이 내 심장을 건드렸다. 나그네의 품에서, 나는 따뜻한 잠을 잤다.
3부
우리는 나그네 연인이 되었다. 다정한 손길이 날마다의 상처를 덮어주었다. 성경 말씀처럼,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허다한 죄를 덮는 길임을 체감했다.
그는 매일 오후 다섯 시가 되면 내게 왔다. 나는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힌 물수건을 꺼내 그의 이마에 얹어주고, 무릎을 꿇어 발을 씻겼다. 밥을 차리고, 그의 숟가락에 반찬을 얹어주었다. 그는 황제가 된 듯 웃으며,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곤 했다. 우리는 가볍게 술을 나누고, 천천히 서로를 들여다보았다.
불을 끄고 침대에 나란히 누웠을 때, 그는 내게 옷을 벗으라고 속삭였다. 나는 남편에게 하듯,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듯, 조용히 옷을 벗었다. 그의 입술이 내 온몸을 감싸 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그는 말했다. “누님, 나그네는 나그네를 알아보는 법이에요.”
우리 둘은 함께 철원 기도원에도 다녀왔다. 어두운 예배당에서 그가 무릎 꿇고 흐느끼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신이 우리에게 작은 위로를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눈을 감고 감사 기도를 올렸다. 나를 이 자리까지 이끌어온 모든 인연과 시련에 감사한다고, 그리고 그를 만나게 해줘서 고맙다고.
우리는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 신라호텔의 방에서, 정원에서, 식당에서, 우리는 세상의 눈치를 벗어던지고 서로를 돌보았다. 나는 그에게 사업자금을 건네주려 했지만, 그는 화를 냈다. 그러지 말라고,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의 진짜 이야기를 들은 건 그날 밤이었다. 그의 아내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친구의 여동생이었고, 고등학교 때부터 연애를 시작했다는 말에 내 가슴이 아릿해졌다. 그녀는 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그는 그 이후로 삶을 내려놓았다고 했다.
나는 그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내게 진실을 들려주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도, 그가 얼마나 상처를 입었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그를 감싸 안고, 나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이 남자와 함께라면,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끝까지 이혼을 거부했다. 미국에서 이혼 소송을 진행하려던 참에, 남편이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 비서는 조용히 내게 말했다. “사모님, 미안합니다.”
나는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이제 사모님 소리는 하지 마요. 언니라고 불러요.”
상주가 되어 장례를 치르며, 나는 담담하게 김 비서 앞에서 아들에게 말했다. “네 아빠가 사랑했던 여자야. 예의를 지켜. 그리고 이 아이는 네 동생이야. 배다른 동생이지만, 네가 보살펴야 할 가족이야.”
장례가 끝나고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품에 안겨, 나는 온몸의 힘을 빼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여보,” 무심결에 그렇게 불렀다.
차 안에서, 어딘가 멈춘 어둠 속에서, 우리는 사랑을 나누었다. 그가 내 몸을 감싸 안을 때, 나는 문득 남편을 떠올렸다. 그가 김 비서와 함께일 때 나를 생각했을까, 그에게 미안한 마음은 있었을까, 나는 그에게 단 한 번이라도 사랑받은 적이 있었을까.
하지만 이 남자와의 사랑 앞에서, 모든 물음은 멈췄다. 내 몸은 그를 기억했고, 내 마음은 그를 품었다. 나는 그에게 속삭였다. “여보.”
나는 더 이상 길 위의 나그네가 아니다. 이제, 쉴 곳이 생겼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