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09 늙은여자의 봄

단편소설

by 경국현





내 나이는 예순여덟.

나는 아직 운전면허가 없다. 그래서 오늘도 강변역에서 안성 가는 버스를 탔다. 교보생명에서 보험 영업을 한다. 먹고 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니까. 평생 내가 우리 집의 기둥이었다. 남편, 아니다. 그냥 ‘저 남자’라고 하자.

안성 터미널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20여 분. 송곡리라는 동네에 도착했다. 젊은 사람이라면 7분이면 갈 길을 나는 15분 넘게 걸었다. 산자락에 기대어 앉은 마을. 잿빛 하늘 아래 바람은 서울보다 쌀쌀했다.

저 남자는 마당에서 개 세 마리와 놀고 있다.

“왔어.”

말끝 하나 붙이지 않는다.

<그래, 왔다. 이 잡것아.>

속으로 욕을 삼켰다.

집 안은 여느 때처럼 난장판이다. 술병, 재떨이, 낡은 방석, 과자 봉지, 냄새 밴 옷가지. 안방 문을 여니 시어머니 특유의 쉰 냄새가 확 풍겼다. 세탁도 안 하고 그대로 지낸 냄새다.

“문 좀 열게요.”

나는 환기를 시켰고, 시어머니는 여전히 구시렁댄다.

“귀에서 윙윙거려. 창문 닫아.”

여느 날과 다름없는 잔소리다.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고, 빨래를 하고 나면, 숨이 턱에 찬다. 이 집의 정체는 무엇인가. 집이 아니라 감옥이다.

시아버지는 올해로 아흔다섯. 내 다리보다 정정한 두 다리로 동네를 돌아다닌다.

나는 이 집의 며느리로 살아왔지만, 내 인생은 없었다. 이 집에서 내가 필요하니까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누구의 마누라’로. ‘누구의 며느리’로. 덫에 걸린 짐승이었다.

밤이 되어 소파에 앉았다. 10년 전, 저 남자는 시골로 내려왔다. 말은 부모님 모시러 내려온다 했지만, 사실상은 책임 회피였다. 남편은 내가 38살이던 해부터 일을 안 했다. 생활비는 물론, 용돈, 술값, 부모 생활비까지 전부 내가 벌었다. 보험영업으로, 발에 물집이 잡히도록, 여름이면 땀범벅이 되도록.

나는 그저 ‘큰며느리니까’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저 남자가 시동생들에게 어떻게 하는지 보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용돈을 주고, 밥을 사주고, 챙겨준다. 전부 내 돈인데, 저 남자는 내가 주는 돈으로 폼만 잡고 살고 있었다.

나는 20대 중반에 중매로 저 남자를 만났다. 아버지가 “사람 괜찮다” 하셨고, 그 한마디에 결혼을 결정했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실수였다.

며칠 전 TV에서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영화를 봤다. 70년을 사랑하며 함께 늙어간 부부 이야기. 그런 사랑은 환상이다. 대부분의 부부는 늙기 전에 한쪽이 죽거나, 바람을 피우거나, 참거나, 남처럼 살다 끝난다. 포기한 관계는 싸우지도 않는다. 싸움은 아직 그 사람이 ‘내 사람’이라 믿기 때문이다.

나는 더는 저 남자의 사람이 아니다.

그날 밤, 나는 작은 방에서 자고 있었다. 어느새 저 남자가 내 옆에 와 있었다.

늙은 손이 내 몸을 더듬었다.

거부하지 않았다.

이 늙은 몸에도 여전히 감각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욕망도, 사랑도, 습관도 아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홑이불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늙어서 뭔 추태야.”

그리고 혼잣말처럼 뭔가를 중얼거렸다.

다음 날 새벽,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며칠 후, 딸과 돼지갈비를 먹으며 딸의 결혼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 돈 없어도 돼. 전세 대출받고, 나랑 오빠가 모은 돈으로 해.”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아냐. 엄마가 2천은 해줄게.”

딸은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엄마, 이혼해.”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렸다.

딸은 나보다 나를 더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내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이혼했다.

고희.

내 나이 일흔, 법원 앞에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이 눈부셨다.

이게 해방이구나.

딸은 꽃다발을 안겨주며 말했다.

“축하해, 엄마.”

나는 세 살 위인 한 노인을 만났다. 대학 교수 출신, 젊은 시절 지성과 품위를 지닌 사람이었다. 지금은 웃음이 많고 장난기가 많은 백발 노인. 함께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떤다. 나를 ‘귀여운 여자’라 부른다.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꼭 알아야 할 게 있어.”

그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오늘 재밌게 살아야 해. 내일은 없을 수도 있거든.”

그리고 그는 나의 손을 주물럭 만진다.

지금 내 손을.

이제야, 나는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keyword
이전 08화08 나그네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