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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국현 Sep 06. 2024

부부 08. 여보

단편소설, 부부, 장편소설




  사모님 죄송합니다. 라고 말을 김 비서가 말한다. 

  김 비서, 네가 벌써 35살이 되었다고···, 나하고 남편이 10살 차이이다. 그러면 남편하고 김 비서는 20살 차이이다. 김 비서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는 나도 한심했다. 아이가 5살이라니···, 

  모르고 산 내가 바보 같은 여자이다. 

  아들이 17살이니, 아들하고는 12살 차이이다. 배다른 동생이 아들에게 있는 거다. 아들에게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생각이 복잡해진다.      



  어이가 없는 일이 내 삶에 일어난 것이다. 서울로 혼자서 도망치듯 온 것이, 2년 전이다. 천호동에 있는 다세대 주택의 2층을 전세로 얻었다. 아들은 고3이 되었다. 남편은 S 중공업 전무이사이다. 

  처녀 때 중매로 만났다. 기독교 집안이라고 해서 믿음의 가정에서 성장한 청년이었다. 남편의 형이 목사였다. 나의 아버지는 장로였다. 오빠는 목사다. 남편을 소개받자마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 신랑감이라고 하였다. 

  결혼하였다. 

  성경 말씀대로 신랑을 주님처럼 섬기었다. 

  퇴근하면 발을 씻겨주고, 여름이면 물수건을 냉동실에 넣어두었다가 퇴근하면 바로 손에 건네주었다. 겨울에는 속옷을 따뜻하게 덥혀서 입게 했다. 숟가락을 들면 반찬을 하나하나 올려 주었다. 지극 정성으로 남편을 섬기었다.

  결혼하고 바로 아이가 생기었다. 

  그해 겨울, 신랑은 인사발령을 받아 미주지역 책임자가 되어 해외 근무했다. 3년의 근무 기간이 끝나고 돌아왔다. 4개월 정도 있다가, 이번에는 유럽지역 본부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시부모를 옆에서 보살필 사람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나에게 같이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남편이 하지 않는 말을 내가 먼저 할 수는 없다. 남편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 생각이 있어서 안 했을 터이니 믿는 것이다. 

  남편의 비서였던 김 비서가 유럽으로 같이 떠났다. 김 비서는 미주지역 근무할 때도 남편의 업무를 보필해 주었었다. 남편은 조직에서 승승장구하는 사람이었다. 해외영업부에서 최연소 임원이 되었다.

  남편은 지구를 한 바퀴 돌다시피 살았다. 

  남편이 한국에 왔을 때, 아이는 고1이 되었다. 나하고 부부로 18년을 산 것이다. 하지만 같이 한방에서 잔 것은 365일이 안 될 것이다. 해외 출장과 해외 근무로 집은 명절날 잠깐 들리는 정도였다.     



  하나님을 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자라온 사람인지라, 성경 말씀에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는 신념은 변함이 없다. 주님이 예비해 놓으신 길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성남 산기슭에 있는 실로암 교회를 알게 되었다. 비바람을 피하고 숙식을 할 수 있는, 가건물 3동을 비닐과 목재로 지었다. 버려진 노인 60명 정도가 숙식하고 있다. 목사는 죽어가는 영혼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사역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교회에 간사로 활동하면서 주일 예배를 보았다. 

  토요일에는 여러 단체에서 봉사하러 온다. 

  봉사활동은 노인들 목욕 봉사와 빨래이다. 셋째 주에 오는 단체가 있다. 거기에 나보다 10살이 어린 37살의 남자가 있다. 

  말이 없는 남자였다. 

  여자는 여자 할머니를, 남자는 남자 할아버지를 목욕시킨다. 거동도 불편하고, 치매 끼도 있고, 기저귀도 차고 있어 목욕 봉사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코를 찌르는 고약한 지린내와 똥 냄새가 잔뜩 베여있다. 처음 온 사람은 헛구역질한다. 여름에는 그 냄새가 다섯 배는 더 지독하다.

  목욕이 끝나면 옷을 갈아입히고 빨래를 한다. 빨래는 커다란 고무다라에 이불, 웃옷, 겉옷, 기타 등등 구분 없이 집어넣고는 발로 밟는 것이다. 손빨래는 할 수가 없다. 

  37살인 남자와 안면이 트이고, 눈짓으로 아는 척하지만 남자는 고개만 까닥일 뿐, 말을 잘하지 않았다. 어느 토요일 오후, 버스를 같이 타고 천호동까지 오게 되었다.

  저녁같이 할래요, 라고 내가 물어보았다. 

  집에 가도 혼자이고,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는 생각도 있었고, 나보다 10살 어린 남자, 10살이 주는 느낌에 밥을 먹자고 했을 것이다. 

  말이 없던 37살의 남자는 좋다고 대답한다. 

  밥보다는 어두워졌는데 술 먹을 수 있냐고 묻는다. 

  교회 다니지 않냐고 물었더니, 

  교회 다니지만, 술을 먹는다고 말한다.

  나더러 젊어 보인다고···, 자기하고 서너 살 차이 나나보다, 생각했었는데, 10살 연상이라고 해 놀랬다 한다.

  말을 시작할 때, 혹은 말이 끝날 때 누님이라는 말이 접두사 접미사처럼 따라붙는다. 

  토요일 봉사에 와서는 조용히 일만 하는 남자였다. 이런 곳에 오면 호들갑스러워지고, 나 이런 사람이라고 뽐내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하고 어울려 수다 떠는 것을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진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말이 없는 남자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말을 잘한다. 

  누님은 원래 혼자 사세요, 라고 묻는다.

  원래는 부산이 집이고, 고3인 아들이 부산에 있다고 했다. 

  왜 혼자 있어요, 누님. 하고 또 묻는다. 

  내 답변이 잘못되었나, 생각이 들었다. 

  망설이다가···, 

  이혼하지 않았지만 이혼하려고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술이 한두 잔 들어가면서 남자하고 하나님, 교회, 봉사 등등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자는 사업하다가 망해서 백수라고 말한다. 월급쟁이 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냥 있으면 생각이 나태해질 것 같아서, 생각을 정리도 할 겸 봉사활동 다닌다고 한다. 출판업을 하는 친구가 있는데, 거기 가서 일을 배울 생각이란다. 기회가 닿으면 출판사업을 해 볼 생각이란다. 

  생활은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마누라가 직장을 다닌다고 한다. 마누라가 벌어서 생활비를 충당한다고 한다. 누님이 술값 내야 합니다. 하고 웃는다. 

  술은 먹지만 신앙심이 있는 남자로 보였다. 

  남자는 소주 두 병을 먹었다. 나는 소주 두세 잔 마신 것 같다. 

  누님 부산에 내려가세요, 서울은 살기 힘든 곳입니다, 남자가 말한다.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혼하지 말고 참고 또 참고 사세요, 말한다. 혼자 사는 것보다는 둘이 사는 게 좋지 않나요, 누님처럼 착하고, 이쁘고, 신앙심으로 사는 여자는 요즘에 없네요, 남자가 술에 취한 듯 말한다. 

  술 먹는 남자를 보면서 내가 연애하자고 하면 늙었다고 욕할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훅 들어왔다. 내가 미쳤지···, 부끄럽다는 마음에 얼굴이 후끈거렸다. 

  내가 술에 취한 것인지, 남편에 대한 복수심인지, 10살 차이라는 호기심인지, 뭐가 뭔지 모를···, 그런 감정에 휩쓸려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편은 나보다 10살이 많고, 김 비서는 나보다 10살이 어리다. 그럼 김 비서하고 이 남자하고는 동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의 이 마음은 복수심이다. 남편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 남자를 유혹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온 것이다.     

  교회 장로인 나의 아버지는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장학금을 주어서 목사를 만든 사람이 열댓 명은 될 것이다. 사실 나의 오빠도 친오빠가 아니다. 아버지가 아들이 없어 어릴 때 양자로 입양한 오빠이다. 중앙대학교 앞에 있는 5층 건물이 아버지 소유였다. 영등포역에도 3층 건물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목사가 된 오빠가 영등포역 건물을 가지고 갔고, 나는 중앙대 앞에 있는 건물을 상속받았다. 신랑도 창원에서는 알아주는 부동산 부자이다. 

  남편이 귀책 사유가 있어도 나와 이혼 안 해주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자기 체면이 망가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대기업에서 승승장구, 지역에서도 한끗발하는 유지로 소문난 집안이다. 교회에 가면 형님이 목사, 자기는 장로, 마누라는 권사, 이혼해 주지 않는 이유는 체면 때문이다. 내가 서울로 오고 나서 하루에 몇 번씩 전화가 왔다. 내려오라는 것이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뻔뻔해도 너무 뻔뻔했다.     



  남자가 많이 먹었다고 일어나자 한다. 

  잘 먹었습니다. 누님 하면서 꾸벅 인사한다. 

  걷는 것을 보니 취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술 얻어먹었으니 집이 어디냐고 묻는다, 동네까지 바래다준다고, 남자가 말한다. 

  그러지 말고 한강공원 가서 이야기나 더하자고 했더니, 

  좋다고 한다. 

  그렇게 천호대교 밑으로 걸어왔다. 벤치에 앉았다. 

  내가 신랑 이야기해도 돼, 하고 물었더니 

  남자가 나를 쳐다본다. 남자가 나를 보더니, 

  누님이 말을 해서 마음이 편해지는 거라면 자기가 밤새워서라도 들어주겠다고 한다. 그런데 말하고 나서, 화가 더 쌓일 것 같으면, 하지 말란다. 

  나는 말하고 싶다고 했다. 아직 아무에게도 못한 말이라 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한강 건너편의 불빛을 보면서 나는 남편하고 살아온 이야기를 하였다. 

  내 이야기를 다 듣더니, 나쁜 사람이네요, 한다. 

  나그네 인생은 길에서 끝난다고, 남자가 말한다. 

  신이 우리를 나그네로 만들었다고 한다. 누님도 나그네이고, 자기도 나그네라고 한다. 하나님은 나그네를 사랑하라 하였지만, 나그네는 쉴 곳이 없어서 길에서 쉰다고···, 말한다. 

  그렇다, 나는 쉴 곳이 없다. 

  서울에서 길을 잃은 나그네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내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목구멍을 막아버리는 슬픔이 올라왔다. 촉촉해진 내 눈을 남자가 보더니, 내 눈을 자기 손바닥으로 가린다. 

  울지 마세요, 라는 말을 들었는데···,

  남자의 입술이 내 입술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눈을 가렸던 손을 치우더니, 나를 끌어당겨 포옹한다. 

  내 눈에 입을 맞춘다. 

  아무리 늦은 시간이지만 한강공원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남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무심하게 나를 위로해 준다. 

  누님, 나그네에게 먹을 것하고 입을 것을 주는 것은···, 길에서 만난 또 다른 나그네 일 겁니다. 누님이 오늘 나그네에게 술을 사주었고, 저는 또 다른 나그네의 이야기를 들었네요, 

  나그네 마음은 나그네가 아는 거예요, 누님. 하고 말한다. 

  눈이 마주쳤다.

  어두운 밤공기에 슬퍼 보이는 남자의 눈이 나를 보고 있다. 고개 숙이더니 나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이번에는 깊은 키스를 한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남자의 입술이다. 

  남편하고 키스해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없다.

  나 늙었는데··· 괜찮아, 내가 물어보았다. 

  누님···, 뭐가···, 왜요···, 라고 말한다. 누님은 나그네 여자, 나는 나그네 남자, 그럼 된 거죠, 뭐···     



  그렇게 우리는 나그네 연인이 되었고, 나이 어린 남자가 나의 애인이 되었다. 김 비서와 같은 나이의 남자였다. 

  나는 남편처럼 이 남자를 내 가슴에 담았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라는 성경 말씀을 난 기억하고 있다. 

  남자는 친구 사무실에 나갔다가 5시경에 퇴근하고 나에게 온다. 

  나는 냉장고에서 물수건을 꺼내서 남자에게 준다. 남자가 소파에 앉으면 난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발을 씻겨준다. 그리고 밥상을 차려서 저녁을 같이 먹는다. 남자가 숟가락을 들면, 밥 위에 반찬을 올려 준다. 살면서 이런 대접을 처음 받아본다면서 남자는 부담스러워한다. 

  남자와 여자, 누가 누구를 챙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같이 즐기고, 같이 대접받아야 한다고 한다. 일방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라고 한다. 남자가 말하는 것이 이쁘다. 

  밥을 먹으면서 반주로 술을 한잔 따라준다. 남자는 자기가 황제가 된 것 같다면서 웃는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눕는다. 

  남자는 나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한다. 

  「아내들은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는 성경 말씀에 따라, 나는 나의 옷을 벗는다. 나는 남편이 된 이 남자의 온몸을 구석구석 만져주고 코와 입으로 샅샅이 냄새를 맡는다.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하라」고 한 말씀대로, 이 남자의 입술은 효과적으로 움직인다. 나에게 공을 들인다. 나의 모든 감각기관을 자기의 팔과 다리 몸으로 감는다. 이 시간이 나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덥느니라」 라는 말씀대로 이 남자 몸 안에서 뜨거운 열기가 나의 몸 안으로 뿜어져 들어온다. 

  나는 쉴 곳을 찾은 나그네가 되었다.

  나는 남편하고 몇 번이나 잠자리했을까, 생각해 보는데···, 셀 수 있을 것 같다, 는 생각이 든다. 

  나는 처음으로 황홀경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뜨거운 물이 터져 나와 질식해 죽을 것 같은 느낌···, 숨이 막혀 온몸이 바르르···, 눈이 뒤집히는 것 같은 순간이다. 사시나무 떨듯 나의 팔다리, 그리고 몸이 떨린다. 남자는 나를 더욱더 세게 안아 준다.     



  남자하고 철원에 있는 기도원에 갔다. 

  우리 두 사람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 시선에 어떻게 보일까, 생각해 본다. 나이가 든 여자와 젊은 남자···, 신경이 쓰인다. 남자는 다른 사람들 시선에 관심이 없는 듯하다. 나의 손을 다정하게 잡는다. 강단 뒤쪽 검붉은 장막에 걸려있는 십자가가 정면으로 보인다. 기도원에 이 남자하고 앉아있는 것이···, 웃긴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이혼을 안 했으니···, 나는 남편이 있는 여자이다. 이 남자도 마누라가 있는 남자이다. 그런데 둘이 기도원에 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뭔 짓인가 싶다. 

  신은 우리를 어떻게 볼 것인지···, 생각하면서 옆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는데, 남자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있다. 뭐라고 웅얼거리고 있다. 

  이 남자는 어떤 기도를 신에게 할지 궁금해진다. 

  엎드려 있는 남자의 어깨가 들썩이며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무엇이 이 남자의 마음을 건드려, 신 앞에 울고 있을까 생각한다. 모르는 척하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10분 정도 산속의 밤하늘을 보고, 기도실에 들어갔다. 남자는 여전히 엎드려 있다.

  나는 인기척을 내면서 그 옆에 앉는다. 

  나는 눈을 감고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기도한다. 아이가 부산 대학교에 입학한 것도 감사하고, 남편하고 같은 집에 있지 않은 것도 감사하고, 울고 있는 이 남자를 만난 것이 무엇보다도 감사하다.  


    

  주말에 여행을 가자고 했다. 금요일 저녁에 가서 일요일 밤에 오자고 하였다. 

  어디 가냐고, 남자가 묻는다. 

  제주도 가자고, 대답했다. 

  제주도는 한 번도 안 가봤다고, 가고 싶다고 남자가 말한다.     금요일 저녁에 김포공항에서 남자를 만났다. 숙소는 신라호텔로 내가 예약해 놓았다. 미리 티켓팅한 비행기표를 남자에게 주고, 봉투를 주었다. 

  남자가 뭐냐고 묻는다. 

  여행 경비라고···, 100만 원 넣었다고 대답했다. 2박 3일 동안 밥값, 교통비 등에 그 돈으로 쓰라고 했다. 남자가 돈을 내야지, 여자가 돈 내는 모습은 보기 안 좋다고 하였더니····, 

  남자가 알았다고 한다. 

  제주도에 와서 신라 호텔에서···, 호텔 수영장과 호텔 정원 그리고 호텔 방에서 2박 3일 동안 있었다. 아침 점심 저녁을 호텔 안에 있는 뷔페, 일식, 중화요리에서 해결하였다.     



  날이 갈수록 남자는 나의 남편이란 자리에 깊숙이 들어와 앉았다. 남자의 가정에 대해서 나는 묻지 않았다. 나는 믿음으로 나의 남편을 모시는 것이다. 남자도 자기 집 이야기를 나에게 하지 않는다. 

  저녁 먹고, 섹스하고, 누워서 이야기를 나눈다. 

  웃다 보면 한밤중이다. 

  남자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는 늦었다고···, 당신 마누라가 기다리니 일어나서 가라고 남자에게 말한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다가 일어난다. 

  남자가 일어나면, 나는 옷을 하나하나 입혀주고, 양말을 신겨준다. 옷을 다 입고 내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택시 타고 가라면서 돈을 준다. 내가 주는 돈 때문에 자존심 상하지 말라고 말한다. 남자는 자기가 돈을 벌 때까지만 받겠다고 말하면서, 씩 웃는다. 

  나를 살며시 끌어안아 주고, 가슴을 만져주고 뒤돌아서 문을 닫고 나간다. 나는 이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주님을 사랑하듯이, 아니 주님보다 이 남자를 더 사랑한다.     



  강 건너 어린이 대공원에 산책을 왔다. 해가 지고 있다. 인적이 드문 곳 벤치에 앉았다. 둘이 손잡고 저 멀리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해가 지면서 숲에 앉아있는 우리 모습은 

어둑어둑해지는 그림자에 가려지고 있다. 

  남자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는 시간의 흐름을 즐기고 있었다. 

  사랑한다, 고 남자가 말하는 것 같았다. 

  뭐지, 잘 못 들었나,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앞을 보고 있다가 고개 든 나를 쳐다본다. 

  남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누님이 아니라 내 이름이다. 

  사랑한다고 말한다. 

  가슴이 뛰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한 번 더 말해달라고 했다. 

  남자가 말한다. 사랑해···, 

  고맙다고 내가 말했다. 

  남자가 대답이 틀렸다고 한다. 

  내가 웃었다. 나도 사랑해요, 라고 내가 말했다. 

  남자가 내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았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가 왜, 일어나냐 하는 눈빛이다. 

  남자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남자의 허리띠를 풀었다. 

  ·····, 

  사랑해요, 

  ·····, 

  내가 말했다.     



  술을 한잔 따라 주었다. 오늘은 내가 술 먹자고 했다. 

  남자에게 사업자금을 주겠다고 했더니, 

  남자가 역정을 낸다. 

  화내지 말고 내 말을 들으라고 했다. 

  이혼하려면 내가 미국에 갔다 와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이혼소송을 할 거라고··· 설명해주었다. 미국에 1년 정도 갔다 와도 나를 만나줄 거냐고 물었더니, 

  남자가 웃는다. 남자가 나그네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한다. 들어보겠냐고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마누라가 없었다. 마누라가 직장 다닌다고, 마누라가 일해서 생활비 충당한다는 것···, 남자가 사업하다 망했다는 것···,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은 거짓이었다. 마누라는 유치원에 막 입학한 아들 데리러 나갔다가 브레이크 파열로 미끄러진 버스에 치여···, 죽었다고 한다. 

  마누라는 어릴 때부터 한동네에서 자란 친구의 여동생이었다고 한다. 코흘리개 때부터 오빠 동생하고 어울려 놀던 사이였다. 애틋한 감정을 가진 것은 고등학교 때라고 한다. 두 살 차이라서, 두 사람 모두에게 첫사랑이었다고 한다. 

  마누라가 사고로 죽는 날, 친구도 자기도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고 한다. 친구와 밤새도록 울었다고 한다. 친구는 하나뿐인 여동생이 죽어서 울고, 자기는 마누라가 죽어서 울고, 양가의 부모님은 손주가 불쌍해서 울고, 그렇게 이틀을 울었다고 한다. 

  사업을 하다가 망한 것이 아니라, 우울증이 심하게 와서···, 회사 다닐 수가 없었다고 한다. 정신병원 다니면서 상담하고, 심해지면 입원 치료하고, 퇴원하면 산속 기도원이나 명상하러 가고, 그렇게 살았다고 한다. 

  장모와 한집에서 사는 처남인 친구와 처남댁이 자기 아들하고 같이 아이를 키워주고 있다고 한다. 다행히 조카와는 한 살 차이라서 외사촌이지만, 친형제처럼 지낸다고 한다. 

  이 남자 과거 속에 있는 슬픈 이야기이다.

  처음 술 먹은 날, 슬퍼 보였던 남자의 눈빛이 생각났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슬픈 미소가 생각났다. 남자는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그네였었다. 

  나그네가 쉴 곳이 없어 길에서 쉰다는 남자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되었다. 부산에서 서울로 도망치듯 왔지만, 쉴 곳 없는 내 마음을 이 남자는 정확하게 알았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고마웠다. 아니 더 사랑스러웠다.     


  남편은 이혼을 거부하고 있다. 

  미국에서 빠르게 이혼소송을 진행하였다. 이혼소송 중에 남편이 죽었다. 이것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지병이 있는 줄 몰랐다. 위암이었다. 

  온몸에 전이가 되어 손쓰기 늦었다고 김 비서가 말한다. 

  암인 것을 나에게 절대 알리지 말라고 했단다. 

  사모님 미안해요, 라고 말한다. 

  김 비서에게 사모님 소리 하지 말고, 언니라고 말하라고 했다. 

  상복 입고 상주가 되어 장례 치르면서···, 당당하게 있으라고 말했다. 

  아들한테도 아빠가 사랑했던 여자이니 김 비서를 엄마로···, 예의 바르게 행동하라고···, 배다른 여동생이지만, 너의 동생이니 네가 보살필 동생이라고···,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밉다고··· 슬프다고···, 말한다.

  울먹이는 아들에게, 슬플수록 어른답게 행동하라고 했다. 

  밉다는 감정으로 죽은 아버지를 판단하지 말라고 했다. 

  아버지가 살아온 삶의 흔적을 자식 된 아들이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아들 아빠다. 이혼하기 전이니, 법적으로는 나의 남편인 사람이다. 마누라는 김 비서가 아니고 내가 마누라이다. 

  5일 장례식으로 하라고 했다. 장례식이 끝나기 전에 어떻게든 한국에 들어가겠다고 김 비서에게 말했다. 

  소송은 의미가 없는 것이 되었다. 표를 서둘러 구하였다. 

  인천 공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나를 보자 손을 들어 흔든다. 종종걸음으로 뛰어가 남자 품에 안겼다. 나를 으스러지게 껴안는다. 입을 맞추어 준다. 남들 보기에 창피하였지만, 남자 품 안에서 장거리 비행의 피로가 사라진다. 

  차 가지고 왔다면서 바로 부산으로 가자고 한다. 

  조수석 문을 여는 나에게 피곤할 터이니 뒷좌석에서 편하게 누워 가라고 한다. 부산에 가면 잠 못 잘 거란다. 천천히 운전하겠다고 한다.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쓰러지듯이 누웠다. 나를 태운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달린다. 밤하늘에 LED 가로등이 보인다. 

  남편이 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눈을 감고 생각해 보았다. 수원쯤 지나면서 조용히 달리는 차의 진동을 느끼며 졸음이 몰려왔다. 

  나의 몸을 만지는 감각에 눈이 자연스럽게 떠졌다. 어딘지 모르지만, 어둠 속에 차는 멈추어 있다. 

  남자가 잠을 깨웠네, 말한다. 

  나는 팔을 벌려 안아달라고 한다. 남자를 안으니, 남자의 입술이 나의 입술에 닿는다. 남자의 몸짓이 잠자고 있던 온몸의 감각을 깨우고 있다. 호흡이 가빠지고···, 나의 몸에 깊이 파고드는 남자의 몸을 느끼면서, 남편이 생각났다. 

  남편은 김 비서하고 몸을 섞을 때, 내 생각을 했을까, 나를 만나기 전에 김 비서는 학생이었나, 나하고 결혼은 왜 한 것일까,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을까, 아니면 나를 바보 천치라고 생각했을까, 나를 사랑했을까, 김 비서를 사랑했을까, 이혼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남자의 움직임이 빨라지자, 생각이 멈추었다. 

  단전에서 불같은 뜨거운 것이 번갯불처럼 척추를 타고 올라가 뒷머리를 강하게 후려친다. 터질 것 같은 머리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나와 단전으로 다시 흘러내린다. 

  나의 윗몸이 반사적으로 일어난다. 나의 두 팔이 남자의 목을 확 끌어안는다.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강하게 껴안는다. 

  나도 모르게 ‘여보’라는 소리가 목젖을 넘어 남자의 귓가에 남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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