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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틈새

단편소설

by 경국현




내 남자라고 믿었던 사람이, 결혼하고서도 여전히 과거의 여자를 만났다.

충격이었다.

남편은 현대자동차 연구소 직원, 나는 K은행 부지점장이었다. 소개해준 건 내 4촌 오빠였다. 우리 부부의 인연은 중매 반, 연애 반으로 시작되어 결혼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그는 3~4개월에 한 번, 그 여자를 만났다. 그저 잊을 만하면 전화가 왔다고, 자긴 그런 뜻 없었다고 변명했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7년이나 계속된 관계였다는 사실이다.

7년, 남편에게는 애인이 있었다.

한순간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가 믿었던 사랑은 굴욕으로, 함께 쌓아온 삶은 절망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 여자는 목동에 살았다. 결혼한 여자였다. 남편은 이혼할 마음이 없다고 했다. 잘못은 인정하니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앞으로는 성실하게 살겠다고 무릎을 꿇었다. 나도 그 어둠 속에서 마지막 빛을 찾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상했다. 이혼할 생각이 없다는 남편이 왜 그 여자를 7년씩이나 만났을까. 용서를 하려면,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했다.

"그 여자를 만나게 해줘."

여자를 만났다.

나는 그녀가 미안한 얼굴로 고개 숙인 채 나타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오래전 친구라도 만나는 듯한 얼굴이었다. 긴 머리에 창백한 얼굴, 소라색 니트 원피스에 체크무늬 겉옷. 단정하고 세련된 모습. 허투루 살아온 사람 같지도 않았다.

“왜 내 남편을 만났죠?”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녀는 커피잔을 들어 천천히 마시더니 말했다.

“그건, 당신 남편한테 물어야죠.”

나를 보는 표정엔 전혀 주눅이 없었다.

“당신 남편을 만난 건 제 사적인 공간이에요. 당신이 이혼을 하든 말든 그건 당신들 문제죠. 나와는 상관없어요.”

기가 막혀 물었다.

“가정 있는 남자 만나고 다니는 게 당당한 일인가요?”

그녀는 웃는다. 한심하다는 눈빛이었다.

“그 남자, 당신 남편이죠? 유부남이 유부녀 만나는 게 문제면, 책임은 남편한테 물어야죠. 내가 미혼이었으면 괜찮았을까요?”

말문이 막혔다. 남편을 쳐다봤다. 그는 고개를 떨군 채 조용했다.

“당신이 먼저 만나자고 했잖아,” 그는 더듬더듬 말했다.

“나는 이혼할 생각도 없고, 가정도 지키고 싶다고 했었잖아.”

그녀는 남편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애원한 적은 없잖아. 당신이 먼저 다가온 거잖아.”

남편은 대꾸 없이 침묵한다.

나는 그녀에게 싸움을 걸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말했다.

“제 남편 전화번호 드릴까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한국토지주택공사 명함을 꺼내 내민다.

“당신이 원한다면 제 남편에게 연락해도 좋아요. 다만, 분명히 아셔야 해요. 당신은 내 문제가 아니라, 당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거.”

당당했다. 불쾌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자신감이 부러웠다. 나는 결심했다.

나는 남편과 이혼했다. 그녀를 만나고 내린 결론이었다. 지키고 싶던 남자는, 지킬 가치가 없었다.

혼자가 된 후, 삶은 공허했다. 부서도 옮기고, 업무도 바뀌었다. 마음을 추스를 겸 스쿠버 다이빙 동호회에 가입했다. 뭔가에 몰두하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았다.

거기서 그를 만났다.

보험회사 세일즈 매니저. 강습 자격증도 있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능숙한 말솜씨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그는 유부남이었다. 나보다 세 살 많았다. 이혼할 수는 없지만, 마음은 자유롭다고 했다.

처음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고, 몸도 따라갔다.

그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나를 찾았고, 나 역시 부동산 투자금이 필요할 때 그의 돈을 이용했다. 우리 사이는 연인 같기도, 사업 파트너 같기도 했다.

그는 이혼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식사자리에서 남자가 어머니를 데리고 나왔다. 나는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백화점에서 산 진주목걸이였다.

어머니는 나를 흘끗 보더니, 아들에게 말했다.

“이혼하고 이 여자랑 살아.”

“감사합니다, 어머니.”

나는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어머니를 보며 중얼거렸다.

“근데, 마누라가 이혼을 안 해줘…”


나의 아내는 변했다.

예전엔 사람 많은 자리를 꺼려하던 여자가, 회식 모임이 있는 날이면 미장원을 들러 화장을 하고 화려한 옷차림으로 나타났다. 내 팔짱을 끼고, 식당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내가 아닌 세상을 향해 시위를 하듯 당당했다.


나는 그녀를 찾아가 내가 당신 남편을 만나는 여자라고 말했다.

“저를 포기하게 만들고 싶은 거죠.”

그녀의 말엔 분노보다 체념이 많았다.


여름 오후, 전화가 왔다.

그가 스쿠버 다이빙 도중 과다출혈로 죽었다는 연락이었다. 바다가 거칠어 무리한 입수였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죽었다.

그가 사망한 후, 생명보험금 24억이 나에게 지급되었다. 시어머니는 돈에 대한 욕심으로 나에게 전화했다. 나는 단호하게, 냉소적으로 말했다.

“이혼 안 하고 죽었으니 잘 죽은 거예요.”


레스토랑 한가운데, 초록빛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앉아 있다.

짧은 단발머리에 윤기 도는 미소. 그녀 앞엔 또 다른 남자가 있다. 보험회사 SM. 얼마 전까지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려다 관뒀다는 남자다.

세상은 틈투성이다.

부부란 무엇인가.

그녀는 또 다른 틈새로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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