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한 달에 한 번, 고등학교 동창 6명이 골프를 친다. 의사, 삼성증권 지점장, 공기업 본부장, 벤처기업 대표, 프랜차이즈 사업가까지. 각자의 삶에서 성공한 친구들이다. 나는 제주도에 살고 있지만, 이 월례 골프 모임을 위해 매달 서울에 올라간다.
이번엔 친구 부부가 제주에 여행을 왔다. 그 친구는 전국민이 아는 떡볶이 프랜차이즈 브랜드의 창업자다. 여행을 오기 전, 친구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마누라한테는 비밀로 해줘." 웃으며 알겠다고 했지만, 전화를 끊고 난 뒤, 왠지 모를 불편한 감정이 가슴 한켠에 남았다.
호텔 커피숍에서 친구 부부를 만났다. 친구의 아내는 단아하고 우아한 중년 여성이었다. 하얀 피부에 정돈된 머리, 조용히 빛나는 목걸이. 미소는 은은했고, 태도에는 어딘지 모르게 고요한 고독이 스며 있었다.
라운딩 중 친구는 무뚝뚝하게 아내를 대했다. 그는 남편이라는 계급장으로 감정을 숨기고 있었고, 아내는 그 벽을 넘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잘 맞지 않은 샷에도 "아잉" 하며 웃고, 입술에 잔잔히 번진 주름 사이로 애교가 묻어났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마누라 참 잘 얻었구나.
나는 친구의 아내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싱긋 웃었고, 그녀도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내 파트너에겐 제주 생활이 어떤지 묻기도 했다. 그녀의 미소 뒤에는 왠지 모를 외로움이 엿보였다.
친구는 나에게 물었다. "애인이냐?"
"아직은 아니야."
그녀는 부산에서 제주로 1년 살이 하러 왔다가 벌써 3년째 머물고 있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여자. 딸 둘은 서울 대기업에 다니고, 자갈치 시장 입구에 건물도 있다. 안 지 1년 반이 넘었지만, 육체적 교감은 없다. 애인이라고 하기엔 아직, 멀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챙기고, 부부처럼 이야기를 나눈다.
저녁 식사 중, 친구 부부의 이야기를 더 들었다. 두 사람은 27년을 함께 살아왔다고 한다. 친구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마포에 5층짜리 사옥을 소유하고 있다. 아내는 말한다. "금실 좋아요. 각방 쓴 지 오래됐잖아."
웃으며 말했지만, 그 말 뒤엔 외로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친구는 사업 때문에 가정에 소홀했고, 아내는 심심하다는 이유로 교회를 다닌다고 했다. "교회, 그냥 동호회 같은 거예요."
며칠 뒤,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이번에 모임에서 우리 마누라랑 제주에서 공쳤던 거, 절대 비밀이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다음 모임은 이천 블랙스톤CC에서 열렸다. 친구, 그 애인, 애인이 데리고 온 여자와 내가 한 팀이었다. 친구의 애인은 마누라보다 미모는 덜하지만, 묘한 매력이 있는 여자였다. 허스키한 목소리에 탄탄한 허벅지, 강한 눈빛. 친구는 애인 앞에서 쩔쩔맸고, 애인은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친구의 애인에겐 강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제주에서 친구가 마누라에게 보여주던 냉정함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친구 애인의 친구, 그 여자는 나와 골프를 함께 치는 게 이번이 세 번째다. 통통한 체형, 똑 부러지는 말투, 하얀 피부. 내게 관심이 있는 듯했고, 친구는 나에게 대시해보라고 했다.
"난 싫다. 기 센 여자 안 좋아."
그런데 후반 라운딩 중 그녀가 다가왔다.
"제주 가기 전에 볼 수 있을까요?"
나는 대답했다. "좋아요."
다음 날, 분당 율동공원 언덕을 올랐다. 블루 블라우스와 아이보리 롱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내 팔을 살짝 잡았다. 언덕 위 사찰 옆의 찻집, 한약 냄새가 퍼지고, 벽에는 말린 꽃잎들과 화병들이 놓여 있었다. 음향기기에서 반야심경이 흘러나왔다.
여자가 속삭였다. "와, 불경이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반야심경을 따라 중얼거렸다.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찻잔을 두 손에 감싸 쥐며 입술을 내밀고 웃는다.
"죽을 때까지 비밀이에요."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그 말의 무게를 느꼈다.
27년을 함께 산 부부는 껍데기만 남았다. 친구는 애인 앞에서 더 진심을 드러내고, 그 관계를 더 숨기고 싶어 했다. 아내에게 비밀을 지키는 것보다, 애인에게 들키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어쩌면, 더 사랑하는 쪽이 바로 그쪽일지도 모른다.
비밀은 비밀이라고 말하는 순간, 비로소 비밀이 된다. 삶이 예상한 대로 흘러갈 거라 믿는 건, 가장 순진한 착각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찻집 한 켠, 허공에 흩어지는 반야심경이 조용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