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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국현 Sep 03. 2024

부부 05. 마누라

단편소설, 장편소설, 마누라




  수학을 가르치는 중학교 교사이다. 

  지금은 교회 다니지 않지만, 학창 시절에는 교회를 다녔다. 1980년 당시에는 교회나 성당에 몰려다니는 것이 일부 여학생들에게 필수 코스였다. 

  교회 오빠, 또는 성당 오빠 찾아다니는 것이다. 저 오빠 어때, 저 오빠는 내 거야, 하면서 은밀하게 친구들과 비밀을 나눈다. 하이틴 소설을 읽은 탓이다. 백마 탄 왕자님 찾아 교회나 성당을 가서는 빨간 성경책을 가슴에 품고 수줍은 듯이 예배당에 앉아있는 것이다. 

  모태 신앙은 아니지만, 교회에 다녔던 부모 때문에 중2 때부터 교회에 나갔다. 당시에 고2이었던 교회 오빠가 있었다. 

  여성호르몬이 왕성해지면서 처음 한 생리에 충격을 받았고,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수증기처럼 생기었다. 하지만, 10대의 소녀에게는 3년이면 넘을 수 없는 강물이었다.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성호르몬이 넘쳐흘러 몽정에 정신 차리지 못할 나이이다. 고2 소년이라고 하지만, 3년이나 어린 중2 여학생을 여동생으로만 생각하지, 성적으로 호기심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고등학교의 시간은 더디게 간다. 

  먼발치에서 사색에 잠겨있는 듯한 오빠 얼굴만 보아도 가슴이 콩닥콩닥했던 사춘기 소녀의 마음이다. 그 마음은 짝사랑으로 일기장에 차곡차곡 담겨 4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청년부에 올라갔다. 오빠는 안 보인다. 군대에 가 있는 오빠가 여름 어느 날 햇볕에 검게 탄 얼굴로 나타났다. 교회 마당에 있는 포플러나무 밑에서 청년들이 둥글게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3년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오빠와 나 사이에 있는 간격은 강물이 아니었다. 가볍게 넘을 수 있는 개울물이었다. 나를 보더니 많이 컸다고, 어느 대학 다니냐고 묻는다. 나는 숙명여대 수학과에 다닌다고 하였다. 오빠는 한양대 전자공학과를 다니다가 군대 입대하였고, 제대를 1년 정도 남겨 놓고 있었다.   


   

  오빠는 제대하였고,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청량리에서 기차 타고 강촌에 놀러 갔다. 봄 아지랑이가 올라오는 철길을 손잡고 걸었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오빠와 첫 키스 했었다. 차가운 듯 낯선 입술의 감촉이 따뜻하고 촉촉했다. 오빠하고 연애하는 동안에 우리는 키스만 몇 번 한 정도였다. 내 가슴을 만지려는 오빠의 떨리는 손을 냉정하게 때렸다. 

  우리 연인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오빠는, 중고등학교 때 일기장에 써놓았던 오빠가 아니었다. 군대 갔다 오더니, 사람이 바뀌었다고 교회 언니들이 걱정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신앙생활에 반듯한 청년인 줄 알았는데, 술을 잘 먹었다. 술 마시면 취할 때까지 먹는 버릇이 있었다. 사연이 있는 것 같지만 그런 것은 나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술에 인사불성이 돼서는 나하고 말다툼했다. 어두운 세상 속에 빛과 소금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모르냐면서 나에게 가벼운 손찌검을 하였다. 다음날 오빠는 기억 못 한다고 하면서 쩔쩔매며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였다.

  철없던 시절의 짝사랑으로 시작한 나의 사랑은 생각보다 두텁지 못하였다. 달걀 껍데기가 작은 충격에도 깨지듯이 눈에 쓰여있던 콩깍지가 벗겨졌고, 사랑에 대한 이별을 통보하였다. 

  아버지가 술을 먹으면 폭력적인 것을 보고 성장한 나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선을 오빠가 넘은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였다. 난 인천 중학교 교사로 발령받았다. 

  교회 권사님이 주선한 중매에서 신랑을 만났다. 신랑은 나를 보자마자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신랑은 다정다감하게 배려가 많은 남자였다. 나를 공주 대접하듯이 하였다. 

  착한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하였다. 

  결혼 전과 결혼 후,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몰랐다. 

  아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은 건데, 내가 잘 못 생각한 것이다. 

  나는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몰랐다. 

  내 삶의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의사결정을 앞에 두고, 

  나는 사람이 좋다고···, 판단하여 결혼 한 것이다. 

  알 수 없는 거였는데···.

  사람을 보고 인식하는 것은 단순하다.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다. 인상이 좋던지, 옷이 세련되었다든지, 집안이 좋던지, 마음이 착한 것 같다든지, 종교가 같다든지 등의 이유로 첫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미리 깔고 간 그 감정으로 인해 두 번째 세 번째는 좋다는 느낌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착한 남자다. 

  좋은 남자다. 

  나를 아끼는 남자다. 

  열심히 사는 남자다. 

  가정적인 남자다. 등의 자의적 판단이 생기는 거다. 

  살다 보면 그것이 전부 틀렸음을 알게 되는 거다. 부부관계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가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결혼 전의 남자가 결혼 후에 어떤 남자가 될 것인지는 내가 선택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복불복, 운이었다. 아니 운명이라고 하는 거였다.     



  나는 그 남자와 결혼하였다.

  3대 독자로 자라서 그런 것인지, 경제적 관념이 전혀 없는 남자였다. 정신적 장애가 있는 어른 남자였다. 건강한 육체였지만, 정신은 아이였다. 흐물흐물한 인생을 사는 남자였다. 직장을 툭하면 그만두었다. 상사가 보기 싫다고, 일이 너무 많다고, 비젼이 없다고, 투덜대는 이유가 가지가지였다. 내 월급으로 살아야 했다. 자연스럽게 남자는 살림을 하고, 내가 돈을 버는 역할이 되었다. 신랑 용돈은 넉넉하지 않았다. 돈이 없으면 시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한다. 시어머니가 용돈을 안 주면, 나에게 달라고 한다. 달라는 돈 안 주면, 시무룩하게 있다가 집을 나간다. 가출이다. 

  이틀이나 삼일 정도 소식이 없다가 집에 들어온다. 

  어이가 없었다. 

  시어머니가 돈을 해준다. 시어머니 보기 미안한 마음에 내가 돈을 몇 번 해주었는데, 딸 아이가 유치원 가면서부터, 이거는 아니다 싶어 모른 척한다. 

  돈에 대해 개념이 없는 남자였다. 

  어느 날 차 사달라고 하였다. 우리 형편에 차는 무리하고 하였더니 또 집을 가출하였다. 시어머니도 차를 안 사주자, 남편은 1년 동안 집에 안 들어왔다. 

  차 사주면 집에 들어오겠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을 보고 아들 잘못 키웠다면서 나에게 미안해한다. 자기 아들하고 이혼하라 한다. 시누이도 한심한 오빠라고 나더러 이혼하란다.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하고, 돌아온 탕자처럼 남편이 정신 차리고 올바르게 성실히 살아 줄 것이라 믿었다. 참고 인내하면서 종교의 힘으로 버티었다. 

  남편이 1년 만에 집에 왔다.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집에 허겁지겁 왔다. 남편은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온 것처럼 실실 웃는다. 진지함이 하나도 없는 얼굴이다. 1년 만에 나타나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아이를 품에 안고는 컴퓨터 게임을 한다. 웃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었다. 

  이혼했다. 

  이혼 안 하고 버틴 것은 그래도 신앙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혼하고서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어릴 적에 같이 교회 다녔던 한 살 많은 언니를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가, 학창 시절 교회 사람들 이야기가 나왔고, 그중에 오빠 이야기가 나왔다.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한다. 어떻게 알았냐고 했더니, 오빠 여동생하고 동창이라서 정기적으로 친목회를 한다고 한다. 여동생이 걱정 많이 한다는 것이다. 맨날 부부싸움 한다고 한다. 그런가 보다 했다.     



  사는 거에 바빠 오빠를 잊고 살았다.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다. 싸이월드 하다가 오빠의 계정을 알게 되었다. 

  사진을 보고, 오빠가 써놓은 글을 보고, 젊었을 때가 생각나서 웃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족사진도 몇 개 보였다. 5-6년 전에 교회 언니한테 들었던 것하고는 달라 보였다. 

  산에 올라가서 혼자 찍은 사진이 있다. 

  그 밑에, 여전히 좋아 보이네요, 댓글 달았다. 

  댓글 보면 누군지 궁금할 것이고 그러면 이름만 딱하니 적혀있는 나의 계정에 찾아올 것이다. 이름 보고 나를 알아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넘어가고, 일주일이 지났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흘러갔다.

  나의 계정에도, 오빠의 계정에도 나를 알아차렸다는 어떤 흔적도 없었다. 오빠 기억 속에서 사라진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1년 정도 지나서 DM으로 오빠가 말을 걸어왔다. 

  「몰랐다, 정말 몰랐다, 

  모르는 사람이 댓글 써 놓아서 누군가 했는데···, 

  나를 아는 사람 같은데, 사진이 없어서 너라는 생각을 전혀 못 했다. 

  모르는 사람이라서 잊고 있었는데···,

  인터넷 서핑하다가 댓글을 다시 보게 되었다. 나를 아는 사람 같은데 누굴까 하는 마음에···, 

  불현듯 너의 이름이 생각이 나더라, 너였구나, 잘 살지···,」 

  하는 글이 연달아 올라왔다. 웃음이 나왔다. 1년 만에 생각이 났다니···,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서로의 얼굴을 보고, 우 와, 참 나, 허, 감탄사만 나왔다. 

  1분인지, 2분인지··· 웃기만 했다.

  내가 지금 마흔 살이니, 몇 년 만에 만난 거지?, 17년 만이네··· 오빠가 말한다. 

  그렇게 오래됐어요, 내가 말했다. 

  여전히 이쁘구나, 말하는 오빠는 나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데 기분이 묘하였다.

  오빠 얼굴에 지나간 세월이 흘러내렸지만, 지적이고 매력적인 모습은 그대로였다. 오빠의 목소리가 정겨웠다. 몸짓에 자신감이 있는 남자였다. 20대 초반에 연애할 때 그런 기분이 들었다. 명함을 달라고 했더니 명함을 꺼내서 주는데 IT사업 하는 대표이사였다. 

  오빠 성공했구나, 말했더니, 

  아니라고 한다. 

  그냥 하루하루 산다고 한다. 

  나더러 신랑은 뭐하냐고 묻는다. 

  그냥 평범하다고, 직장 다닌다고 말했다. 

  이혼했다고 말하기 싫었다. 

  오빠는 행복해 보여요, 라고 말했더니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싸이월드 보니 행복해 보이던데···, 라고 대답하였다. 

  싸이월드는 남에게 보여주는 연출이라고 말한다. 

  오빠는 쇼윈도우 부부로 산다고 말한다. 

  부부로 보면 내가 더 행복한 부부일 거라, 한다. 

  나는 웃었다. 

  왜 웃는지 묻는다. 

  몰라도 된다고 말했다. 

  인연이 무엇인지 순간적으로 생각한다.

  인연은 우연으로 시작할 것이다. 

  오빠하고 인연이다, 생각했다.

  몇 시까지 들어가야 하냐고 오빠가 묻는다.

  늦어도 괜찮다고 말했더니, 

  그래도 신랑이 있는데···, 하면서 말을 흐린다. 

  밥 먹으러 가자고 한다.

  내가 지금도 고기 좋아하냐고 묻는다. 

  그것을 기억하고 있냐고 말했더니, 

  너에 대한 것은 다 기억한다고 한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다. 

  1년 동안 누군지도 몰랐으면서···, 내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한우전문점에 왔다. 최고로 비싼 부위를 주문한다. 

  숯불에 한우가 올려지자 듣기 좋은 소리가 들렸다. 

  입에 침이 고였다. 

  술 먹어도 되냐고 묻는다. 

  먹자고 하였다. 

  지금도 술주정이 심하냐고 내가 물었다. 

  나하고 헤어지고 나서 취하게 먹은 적이 5번도 안 된다고 말하면서 웃는다.

  오빠는 처음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싱글벙글 웃는다. 웃음이 얼굴에서 번져 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는 듯 보였다. 오빠의 웃음은 첫 만남부터 어색할 뻔했던 분위기를 따뜻하게 만들고 있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흘겼더니, 오빠가 이번에는 커다란 웃음소리를 보여준다. 

  나더러 신랑 이야기해 보란다. 

  언니 이야기 먼저 하라고 했다. 

  중매로 만났다고 한다. 

  나더러 같이 교회 다녔던 자기 친구를 아는지 물었다. 

  누군지 안다고, 키 크고 여드름 많고 노래 잘했던 오빠 아니냐고, 기억난다고 하였다. 

  그놈이 자기 사촌 여동생을 소개해줘서 결혼했다고 한다. 

  결혼하고 신혼여행 둘째 날 저녁에 싸우고, 서울에 올 때까지 말 안 했다고 한다. 화난 것을 기분 좋게 해주려고 아부 떨고 재롱떨었는데, 말 안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니다 싶었는데, 아이가 생겨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애가 몇 명이냐고 물었더니 

  둘이라고 한다. 

  애 엄마가 고집이 너무 세서 거의 말 안 하고 산다고···, 자기 생각을 말하면 대부분 싸움이 돼서 마누라에 대한 그 어떤 것도 기대 안 한다고 말한다. 집에는 늦게 들어가고 일찍 나온다고 한다. 대신 돈 걱정 안 하고 살게끔 생활비를 준다고 한다. 대화가 없는 부부라고 한다. 다행히도 아이들을 잘 양육해 주어 아이들이 공부 잘한다고 한다. 

  그걸로 만족하고 산다고 한다. 

  나더러 신랑 이야기해 보라고 하길래, 죽었다고 했다. 

  오빠가 크게 웃는다. 

  웃으면서, 너 이혼했구나, 말한다. 

  어떻게 아냐고 물었더니, 

  내가 거짓말하면 왼쪽 눈이 살짝 커진다고 한다. 

  내가 그랬나,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나의 버릇을 오빠가 알고 있는 듯하다. 입술을 쫑긋 내밀었다. 

  오빠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 2시간 정도 수다 떠니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 이혼했는지 안 묻냐고 했더니···,

  안 궁금하다고 한다. 이혼했는데 궁금할 것이 뭐가 있냐고 한다.

  저녁 먹고 노래방 가자며, 오빠가 내 얼굴을 훑듯이 본다. 오빠의 눈빛에 내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음을 느낀다.

  둘이 연애할 때, 86 아시안 게임을 전후해서 서울에는 노래방이 생기기 시작했다. 둘이 가기도 했지만, 다른 친구들하고도 자주 노래방 가서 놀았다. 부산에서 올라온 노래방이 서울의 밤거리를 장악하던 때이다. 

  나더러 먼저 노래하란다. 

  나는 희나리를 불렀다. 

  내 노래가 끝나자 오빠는 일어나서 마이크를 잡더니 노사연의 만남을 부른다. 나더러 나오라고 한다. 나가서 오빠 옆에 섰더니, 나의 손을 잡는다. 

  내 손을 잡고 노래 부른다. 

  듣기 좋았다. 

  오빠가 손을 풀어, 내 어깨를 감싼다.

  어깨에 기댔다. 

  노래가 끝났더니, 만남이란 노래를 한 번 더 신청한다. 

  나를 안고는 블루스 추듯이 움직인다. 

  귀와 목 뒤로 오빠의 숨소리가 들렸다.

  오빠의 볼이 내 볼에 부딪혔다. 키스하려 하는 몸짓이 더디게 느껴졌다. 내 입술이 떨리기 시작하였다. 눈을 감고 오빠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뜨거운 키스였다. 키스는 강렬했다. 나도 오빠도 정신없이 서로의 입술을 탐하였다. 옷 속에 감추어진 몸이 벌거벗은 몸처럼 서로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흥분이 물줄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두 사람 다 속도 조절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용기가 아니었다. 입 다물고 살아온 인생에 대한 보상심리였다. 두 사람 모두 몸 안에서 올라오는 힘을 억누를 수 없었다.

  노래방의 반주만 반복되었다. 오빠는 내 귓가에 미안하다고 말한다. 추억과 상상으로 살아온 삶을 끝낼 때가 되었다고 한다.

  나도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얼굴이 붉어진 채로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오빠와 벌써 14년을 만나고 있다. 오빠는 이혼하지 않았고, SNS 보면 여전히 성실한 가장으로 오빠는 포장되어 있다. 오빠는 일주일에 서너 번 나하고 저녁 먹는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주말에 딱히 일정이 없으면 같이 보낸다. 

  오빠에게 내가 누구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누구긴···, 너는 내 마누라이지, 말한다. 

  언니는 누구냐고 물었더니, 

  누구긴···, 애들 엄마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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