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신랑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저녁은 집에서 먹을게.”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짧은 문자 하나를 보냈다.
“집 앞에서 봐.”
냉장고를 열고 삼겹살을 꺼냈다. 칼끝이 고기 위를 스치자, 허벅지 안쪽에서 알 수 없는 전류가 일었다. 뻐근하고 아릿한 감각. 몸이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삼겹살 한 근을 홀로 해치우며 소주 한 병을 천천히 들이켰다. 나는 고기 두 점을 건성으로 입에 넣었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TV에 고정되어 있었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선 그는 과자 봉지를 껴안은 채 리모콘과 핸드폰을 손닿는 거리에 배치해두고,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그의 배는 여덟 달 된 임산부처럼 불룩했고, 인슐린 주사를 맞으며 당뇨와 고혈압, 고지혈증을 동거인처럼 품고 살아간다.
그 몸으로도 골프 타수 90 이하를 유지하는 걸 보면, 시아버지 덕에 20살부터 친 골프의 위력인가 싶다.
“운동 좀 하고 올게. 두 시간 정도 걸려.”
그의 시선은 여전히 TV 속 볼을 쫓고 있었지만,
“너무 늦지 마. 운동 끝났으면 바로 와야지. 또 카페에서 수다 떨 거 아냐?”
말끝은 짜증보단 권태에 가까웠다.
나는 나이키 러닝복 상의를 여며 머리를 묶었다.
“작은애가 열한 시쯤 올 거니까 그 전엔 들어올게.”
그는 무심하게 “알았어.”라며 고개만 끄덕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어둠을 가르며 공원을 향해 달렸다. 숨이 빠르게 차올랐고, 가슴은 고동쳤다.
정해진 시각, 정해진 장소.
그는 늘 그 자리에 먼저 와 있었다.
조수석 문을 열자, 말없이 내 손을 잡는 그의 손끝에서 익숙한 온기가 느껴졌다.
와이셔츠를 걷어붙인 팔뚝의 힘줄이 번졌다. 팽팽하게 조여드는 기운, 가벼운 전율.
차 뒷좌석엔 넥타이와 재킷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인덕원으로 갈까?”
그의 말에, 나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요 앞 모텔 가자. 농수산물시장 건너편.”
그가 잠시 망설였다.
“거긴 집이랑 너무 가까워.”
“그래서 더 좋아. 가까울수록 짜릿하잖아.”
운전하던 그의 손이 다시 내 허벅지 안쪽을 더듬는다.
한쪽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다른 손은 속옷 위를 스치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숨을 내쉴 때마다, 나도 모르게 허벅지가 벌어졌다.
차 안은 이내 단내와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모텔에 도착했다.
방 안은 단출했다. 형광등 불빛이 흐릿했고, 침대 위 흰 시트는 조금 구겨져 있었다.
그는 샤워를 마치고 수건 하나로 허리를 감싼 채 나왔다.
“샤워 안 해?”
나는 웃으며 말했다.
“운동하다 온 여자한테 땀 냄새 나는 게 맞지. 향기로운 건 이상하잖아.”
옷을 벗었다. 브라를 푸는 순간, 그의 시선이 나의 몸을 훑었다.
몸이 닿는 순간,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탐했다.
그의 손끝은 능숙했고, 입술은 오래된 갈증을 기억한 듯 집요했다.
숨소리가 얽히고, 피부는 번졌다.
침대 위, 욕망으로 뜨거워진 두 개의 육체였다.
내 몸속 어딘가에서 불이 붙었다.
남편과는 한 해에 네댓 번, 피곤한 의무처럼 이어가던 행위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이건 선택이었고, 욕망이었고, 살아 있다는 증명이었다.
한 시간이 흘러, 그는 조용히 나를 처음 만나던 곳 근처에 내려주었다.
차에서 내리기 전, 짧은 키스가 오갔다.
“조심해서 가.”
그의 말에 나는 미소 지었다.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집으로 향했다.
거실에선 남편이 소파에 누운 채 여전히 골프 중계를 보고 있었다.
소파 밑엔 빈 과자 봉지가 굴러다녔다.
나는 서둘지 않고, 무심히 그에게 미소 지었다.
“일찍 왔네?”
“당신 눈치 보여서.”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오렌지를 꺼내, 껍질을 벗겨 남편에게 건넸다.
그는 눈을 깜빡이며 하나를 더 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의 몸을 흘긋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운동 좀 해야 해. 오래 살아야 하잖아.
내가 과부 되면 안 되니까.”
남편은 듣는 둥 마는 둥, 다시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등 뒤, 나는 여자의 모습이 아닌,
조용히 숨죽인 아내라는 이름의 그림자로 앉아 있었다.
아침 10시.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들이 학교로 나간 뒤, 집 안엔 정적이 맴돌았다.
베란다로 들어온 햇살이 벽지를 타고 미끄러졌다.
그때, 진동음이 울렸다.
“오늘, 볼 수 있을까?”
익숙한 이름. 나는 주로 낮에 그를 만났다. 낮의 은밀함은 밤보다 더 농밀했다.
동네 사람들… 너무 많은 눈이 있으니까.
하지만 가끔은, 남편이 집에 일찍 들어온 날, 내 쪽에서 먼저 그에게 연락을 하기도 했다. 금기의 문을 열고 뛰어드는 그 스릴, 그것이 오히려 더 격렬한 쾌감을 불러왔다.
한낮의 햇살을 헤치고 나는 집 앞 평촌공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내 차를 한쪽에 주차하고 그의 차로 옮겨 탔다.
우리는 말없이 달렸다. 광명의 밤일마을, 우리만의 단골 일식집.
식당에 들어서자, 나무 결이 살아 있는 테이블 위로 찻잔이 놓였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엔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걸 알고 있는 듯한 눈이었다.
"행복해?"
그가 조용히 물었다.
행복이라… 대체 그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일까?
“행복? 잘 모르겠어. 그래도 지금은 살아 있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대부분 살아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거야.”
그의 말이 가슴에 박혔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아내'라는 가면을 쓴 채 살아왔던 것이다.
사랑이 아닌 의무, 쾌락이 아닌 참음, 감정이 아닌 체념.
나는 살아 있었지만, 나로 존재하지는 않았다.
“인간은 본능대로 살 때 행복해지는 존재야.”
그가 다시 말했다.
“본능은 죄가 아니야. 오히려 억눌림이 죄를 만들지.”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이 남자가 내 몸을 관통하던 떨림을 떠올렸다.
그 떨림은 죄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몸의 언어, 행복을 갈망하는 내 안의 본능이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근처 모텔로 향했다.
방 안엔 은은한 조명이 켜졌고, 커튼 틈 사이로 부드러운 햇살이 살짝 들어왔다.
그는 내 머리칼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지금 이 순간, 너는 진짜 너야.”
나는 웃음 대신 조용히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 안엔 부끄러움도, 죄책감도 없었다.
단지, 사랑받고 싶다는 갈망만이 가득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감각으로 시작된다.
행복은 도덕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충족감으로 존재한다.
나는 그의 품 안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살고 있다.
나라는 여자가, 이 순간만큼은 진짜 존재한다.
햇살이 거실 깊숙이 스며들었다. 나는 식탁에 앉아 믹스 커피를 타 마시며, 방금 도착한 문자를 바라보았다.
“오늘 점심, 너.”
그 짧은 한 마디가 심장을 두드렸다. 욕망은 언제나 단순한 언어를 선호했다.
남편은 오늘도 평상시처럼 퇴근할 것이다. 아이들은 학교에 있고, 집은 고요했다. 그녀는 간단히 화장을 고치고, 평소보다 약간 타이트한 청바지에 셔츠를 걸쳤다. 거울 앞에서 고개를 조금 기울여보았다. 눈가의 잔주름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이 얼굴에 입을 맞추며 “예쁘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택시를 타고 인덕원역 근처 카페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창가에 앉아 있었다. 햇빛이 그의 흰 셔츠 소매를 비추며, 시간 속에 멈춘 조각처럼 보였다.
“늦었네?”
“늦고 싶었어. 그래야 더 보고 싶을까 봐.” 나는 웃으며 앉았다.
그의 손이 나의 손등을 덮었다. 그 따뜻함에 잠시 눈을 감았다. 마치 외투 속으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 같았다.
식사는 간단히 일식집에서 해결했다. 점심시간이 지난 한산한 식당에서, 우리는 마주 앉아 오롯이 서로의 온기에 집중했다. 젓가락질 사이사이로 스치는 손끝, 불쑥 다가오는 그의 눈빛에, 나는 자꾸 웃음이 났다.
“행복해?” 그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목을 가볍게 만졌다. 그의 맥박이 뛰고 있었다. 살아 있는 감정이었다.
자리를 옮겼다. 조용한 공간 속의 우리. 창밖의 소음이 마치 바깥세상과 우리를 구분해주는 벽처럼 느껴졌다.
“가끔은 우리가 죄를 짓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본능을 따라가고 있는 것 같아. 그게 인간인 걸까?” 내가 낮게 말했다.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 살지, 도덕을 위해 사는 건 아니잖아.”
그의 말은 간결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많이 참고, 너무 오래 착하게만 살아온 자신이 떠올랐다.
나는 문득 대학에서 교양 철학에서 배운 한 구절이 떠올랐다.
“쾌락은 죄가 아니다. 쾌락을 두려워한 인간의 규범이 죄를 만들었을 뿐이다.”
그의 손이 나의 무릎에 닿았다. 그 손은 집요하지 않았고, 대신 따뜻했다.
몸이 아니라, 감정이 먼저 흔들렸다.
“이대로 있고 싶지만…” 나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4시 40분.
“나 가야 해. 남편보다 먼저 집에 돌아가야 하니까.”
그는 아쉬움의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는 나를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너, 참 예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집 앞에서 잠시 멈췄다.
하늘은 점점 저녁으로 물들어가고 있었고, 내 안의 욕망, 죄책감, 행복, 허기, 철학, 육체가 뒤섞인 감정들이 잠시 멈춰 있었다.
현관을 열고 들어서자, 남편이 막 들어오던 참이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운동 갔다 왔어. 오늘따라 하늘이 참 예쁘더라.”
남편은 그녀를 쓱 쳐다보더니, “얼굴이 좋아 보이네. 뭐 좋은 일 있어?” 하고 묻는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냉장고에서 오렌지를 꺼내 그의 손에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