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위에 세워진 평화

이스라엘은 왜 이란을 선제공격했는가 – 2025년 6월의 기록

by 노경문

"각자의 생존을 위해 전쟁을 한다."

그 말은 처음 들었을 땐 그럴듯하다.

그러나 곱씹을수록 그 문장 안엔 무언가 본질적으로 뒤틀린 것이 숨어 있다.


누군가의 생존을 위해,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면

그건 생존이 아니라 사냥이다.

이스라엘은 또다시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이번엔, 이란이었다.

가자지구, 헤즈볼라, 시리아를 지나 마침내 그들이 말해온 진짜 '위협의 근원'에 도달한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죽이는 나라


이스라엘은 말한다. "우린 살아남기 위해 싸운다."

그 말에는 홀로코스트의 기억과 수차례 전쟁의 공포가 배어 있다.

그 공포는 '먼저 맞기 전에 때린다'는 전략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그 정당함은 민간인의 죽음을 '불가피한 피해'로 바꾼다.

총성은 테러가 아닌 작전이 되고, 사망자는 이름 없는 숫자가 된다.

전쟁이 생존이라면, 죽음은 생존의 부수물인가?

이스라엘은 혼자가 아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혼자라고 믿는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그 땅에서, 생존은 단지 '살아 있음'이 아니라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상상 속에서의 지속'이다.

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 전략적 완충지대를 확보할 수 없는 탓에, 선제공격을 생존의 방식으로 채택해 왔다.

1981년 이라크, 2007년 시리아, 그리고 지금 이란.

그들은 상대가 핵무기를 가질 수 있다는 징후만으로도 먼저 때린다. 이스라엘의 안보 교리인 '베긴 독트린'은 실제로 행동으로 입증되어 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나중'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란이 핵을 가지는 순간,

하마스와 헤즈볼라는 핵우산 아래의 대리인이 되고, 유대인 학살의 기억은 새로운 멸절의 공포로 덮인다. 그것이 그들을 끊임없이 먼저 공격하게 만든다.

선제공격은 이스라엘에게 방패이자 칼이다.

문제는 방패가 공격을 멈추지 않을 때, 세계는 그 칼을 어디까지 정당화할 것인가다.




정치는 죽음의 이유가 된다


전쟁은 안보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때로는 정치가 전쟁을 만든다.


이스라엘의 총리 네타냐후는 지금도 부패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그를 둘러싼 연정은 극우-초정통파 동맹이며, 사법부 권한 약화를 둘러싼 갈등으로 수십만 명의 국민이 거리에 나와 "민주주의를 지켜라"고 외쳤다.

그런 위기 속에서 그는 안보 위협을 꺼내 든다.

그가 꺼내는 카드는 늘 같다.

"적이 있다. 우리가 먼저 때려야 한다."

이란을 향한 선제공격은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네타냐후 자신의 정치 생존을 위한 조율된 폭력이다.


그는 말한다. "나 아니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안보에 대한 말이기도 하고, 사법 정의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전쟁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리더를 믿는다. 그리고 믿음은 때때로 기억을 지운다.




누가 전쟁을 시작했는가


전쟁에는 '첫 번째 총성'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전에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분노, 공포, 증오, 그리고 정치적 계산이 있다.

군사적 층위에서 바라보자.

이스라엘은 이란이 핵개발을 계속할 경우, 자신들이 먼저 무너질 수 있다는 공포를 품고 있었다.

이란은 핵개발을 방어적 억제력으로 간주했지만, 이스라엘은 그것을 실존적 위협으로 읽었다.

외교적 층위에서 다시 보면,

미국의 대이란 제재, 트럼프 행정부의 이란 핵합의 탈퇴, 사우디-이스라엘 간의 접근 등은 이란을 점점 더 고립시켰다. 반면 이란은 시리아 내전과 레바논, 예멘 등지에서 '대리전 구조'를 확대하며 저항했다.

심리적 층위에서 곱씹어 보면, 양국 모두 집단기억 속에 깊게 박힌 '학살과 침략의 공포'가 존재한다. 공포는 선제행동을 정당화하고, 선제행동은 전쟁의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한다.

정치적 층위에서 바라보면, 이스라엘은 국내 위기(네타냐후의 사법 리스크, 반정부 시위)를 외부 위협으로 덮고, 이란은 내부 경제 불만을 '외부 압력과 위협'으로 상쇄시킨다. 전쟁은 그들에게 단지 전략이 아니라 정권의 유효성을 입증하는 무대다.


어쩌면 첫 총성은 누가 쐈는지가 아니라, 누가 마지막으로 피하지 않았느냐로 기억될 것이다.

누군가는 결정을 내렸고, 누군가는 그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기억되지 못한 두려움의 역사


이란에게 전쟁은 낯설지 않다.

1980년부터 1988년까지 벌어진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는 당시 화학무기를 사용했고, 미국은 침묵했다) 수십만 명이 죽거나 실명했고, 소년병들은 14살에 전장에 내몰렸다.

그 이후, 이란은 고립되었다.

제재와 봉쇄는 일상이 되었고 자신들을 지킬 유일한 방법은 균형을 맞출 무기였다.

핵은 공격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공격당하지 않기 위한 보증서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의 두려움을 또 다른 공포로 바꾸어 기억했다.

이란에게도 홀로코스트는 있었다.

이라크의 화학전, 국제적 외면, 수십만의 죽음.

그들에게 핵은 생존이 아니라 기억의 재방어였다.

그들도 말한다. "우린 살아남기 위해 싸운다."




살아 있다는 것의 윤리


모두가 말한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싸운다.”

그러나 그 말 속에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비명이 사라진다.

정말로 생존을 위한 싸움이라면 살아남은 자들은 더 윤리적이어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

그들은 냉소적이 되었고, 죽음을 전략으로 계산하며 살아남은 자신을 '정당화'했다.

나는 이제 묻고 싶다.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옳은가?

그리고 그 생존이 누군가의 무덤 위에 세워진 것이라면

그건 정말 살아 있는 것인가?




우리는 여전히 “생존”이라는 단어를 쉽게 말한다. 그러나 생존은 죽음을 정당화하는 단어가 되어선 안 된다.

진짜 생존이란, 누구도 죽이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끝없는 질문의 태도 아닐까.

당신은 지금, 누구의 생존을 응원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생존이 누군가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면, 당신은 정말 살아 있는 것인가?

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