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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란 Nov 20. 2021

완벽한 무지개가 뜬 날

간단히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 아주머니가 하늘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오늘 하늘에 뭔가 별다른 일이 있나 싶어 고개를 드는 순간, 보고 말았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무지개였다.


콤파스로 그린 것 같은 완벽한 반원의 형태. 이렇게 빈틈없이 완전한 무지개는 처음이라 감탄이 나면서도 그 비현실적인 모습에 살짝 무섭기도 했다. 무지개를 경계로 위 하늘과 아래 하늘이 달라 보였고, 마치 하늘이 갈라지며 무언가 내려올 것 같기도 했으니까. 너무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 그 장면이 이질적이라 두려울 수도 있다는 걸 순간 깨달았다. 그래도 이 순간을 놓치긴 아까워 나도 빠르게 휴대전화를 꺼내 연신 셔터 버튼을 눌렀다.


며칠 전부터 밴쿠버에서 오로라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내 고양이가 건강을 회복해 하루 두 번 인슐린을 맞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오면, 옐로나이프나 유콘 지역으로 오로라 헌팅을 떠나고 싶었다. 그런데 밴쿠버에서 볼 수 있을 거라니! 심장이 몹시나 두근두근거렸지만, 이내 전문 장비가 있어야 볼 수 있는 정도의 미미한 수준이라는 걸 알고 단념했다. 나는 금사빠이기도 하지만 포기도 빠른, 그러니까 내 마음이 헛된 기대로 차올랐다가 실망하는 걸 싫어하는 그런 인간이니까. 그리고 이 완벽한 무지개가 뜬 날은, 오로라 지수가 높다는 소식이 아침부터 전해지며 (아마도) 모두가 설렜을 수도 있는 그런 하루였다.


오로라 대신 무지개였지만, 완벽한 무지개를 봤다는 것만으로도 못 본 오로라가 아쉽지 않았다. 페이스북을 통해 지역 커뮤니티에 들어갔더니 이곳 토박이들조차 인생 최고의 무지개라는 감탄을 뱉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좀 럭키한 게 아닌가! 이곳에 이사 오고 1년 만에 이런 무지개를 만났으니까 말이다. 


사진을 몇 장 찍고 서둘러 집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했다. 빨리 테라스로 나가보라고, 그곳에서 엄청난 걸 보게 될 거라고. 남편은 전화를 끊지 않은 채, 테라스로 나가 감탄을 뱉어냈다. 이 환상의 순간을 남편과 함께하고 싶어 서둘러 집에 들어갔더니, 온 집의 창이 무지개로 가득했다. 특히 남편 방의 창문에선 무지개의 꼬리 부분이 바로 앞 건물에 가려져 마치 구름다리가 생긴 것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우리는 무지개가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창문 앞에서 머물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한 날들에도 행복할 일들이 생긴다. 이날은 무지개가 그랬고, 어제는 간만의 햇빛이 그랬다. 너무 즐겁거나 행복할 때면, 이 이면 어딘가에 불행의 징조가 있지 않을까 불안하다. 그러나 약간의 두려움까지 동반했던 이 완벽한 무지개가 사라지던 순간, 왠지 모르던 무서움도 함께 없어졌다. 그러니까, 좋은 순간엔 그냥 마냥 단 기분만 느껴도 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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