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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란 Jan 11. 2022

오늘의 태양과 굿나잇 인사를

스티브스턴Steveston (Richmond, BC)

광역 밴쿠버 중 한 곳인 리치몬드로 이사를 온 후, 가장 먼저 가본 맛집은 스티브스턴 피자 컴패니Steveston Pizza Company였다. 이곳에는 한 판에 무려 89달러인 피자가 있다. 새우, 로브스터, 연어, 매쉬 포테이토가 아낌없이 들어간 보기만 해도 호화로운 피자다. 피자 한 판 가격치고 너무 비싼 것 같지만 꽤 인기 있는 메뉴인 것 같다. 밴쿠버 여행을 다녀간 사람 대부분이 이 피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보면 말이다.

(이 피자 가게에는 이것보다 더 비싼 피자가 세 종류나 있는데, 제일 비싼 건 타이거새우와 로브스터, 무지개송어, 캐비어, 화이트 트러플이 들어간 850달러짜리다.)  

먹어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가격은 비싸지만 네다섯 명이서 나눠 먹을 만한 양이고, 그렇다면 한 번쯤은 써볼 만한 금액"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이삿짐 정리가 되자마자 그 프리미엄 럭셔리 피자의 명성을 확인하고 싶었다.  


스티브스턴이라는 동네는 내가 사는 곳에서 차로 15분 떨어져 있다. 그곳에 처음 도착한 순간, 나는 피자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하늘과 바다가 내 시야 안에서 맞닿아 있었다.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이 싱그러운 비린내는 어떻고. 고래 덕후의 심장을 떨리게 하는 구조물까지 모든 게 완벽한 곳이었다. 이제 막 리치몬드로 이사 온 풋내기였지만,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여기 너무 좋아! 최고야! 나 여기서 살고 싶어!"


그 후로 나는 심심하면 스티브스턴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해 바닷가를 따라 걷다 보면 즐거움이 차올랐다. 1년간 틈날 때마다 그 바닷가 마을에 가서 이곳저곳을 탐험했다. 바다의 색과 냄새를 느끼며 산책할 수 있는 개리포인트 공원Garry Point Park, 조지아만의 어업 역사를 볼 수 있는 통조림 공장 박물관, 신선한 해산물을 살 수 있는 스티브스턴 부두의 시장, 19세기에 어업 이민을 온 일본, 중국 노동자들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브리타이나 조선소 부지와 중국인 합숙소 등. 크지 않은 그 마을의 해변가를 걷는 것만으로도 내가 살지 않은 오랜 과거의 일들을 상상할 수 있고, 더 먼바다의 일들을 엿볼 수 있다.

이제 작년이 된 어느 날에는 스티브스턴 부두에서 배를 타고 조금 먼바다로 나가 고래와 물개와 온갖 물새들을 보고 오기도 했다. 많이 걷고 싶은 날에는 리치몬드의 서쪽에 있는 테라노바 공원Terra Nova Rural Park에서 출발해 웨스트다이크 트레일West Dyke Trail을 따라 한 시간 넘게 가서 스티브스턴에 도착했다. 거기서 조금 더 가면 핀 슬로우Finn Slough라는 온갖 상상을 다 불러일으키는 아주 매력적인 장소도 있는데, 거긴 스티브스턴은 아니니 일단 빼고.


어쨌든, 스티브스턴은 언젠가는 꼭 바닷마을에서 살고 싶은 나의 바람을 아주 조금이나마 채워준다.

지난 일요일엔 모처럼 날이 개었다. 이 날씨를 그냥 보낼 수는 없었는데 늦잠을 자고 말았다. 날이 좋으면 어디든 놀러 가자던, 전날의 말이 물거품이 되었지만 괜찮았다. 스티브스턴으로 가면 되니까.

점심을 먹고 좀 늦장을 부린 탓에, 스티브스턴에 도착해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해가 지기 시작했다. 모처럼 해가 나온 날이었는데 허투루 보낸 것 같아 조금 시무룩했지만, 뭐 이곳에서라면 괜찮았다. 이곳의 석양은 정말 근사하다. 날씨가 좋은 날의 석양은 더없이 완벽하다.

나는 남편의 손을 단단히 잡고 석양 아래를, 지는 태양이 만들어내는 바다 위 배 그림자들의 옆을 걸었다. 아침 인사를 하지 못했어도, 이른 오후의 일광욕을 하지 못했어도 괜찮았다. 저무는 오늘의 태양과 굿나잇 인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남편이 재택근무를 한 지도 2년이 지났다. 걱정 많은 배우자와 살고 있는 탓에, 나도 지난 2년간은 이곳에서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많던 계획들은 묵혀져서 이미 희미해졌고, 의욕도 점점 사라졌고, 심심한 것도 모르는 심심한 채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날이 좋은 주말이면, 마스크로 꽁꽁 싸매고 이곳저곳을 걸어다녔다.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두세 시간도 걸었다. 그 시간들이 2년이라는 답답한 기간을 버티게 했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의 시간도 이번 주를 지탱해줄 것이다. 태양과의 그 짧은 인사가 다음 산책까지 나를 보듬을 것이다.


매해 연말이 되면, 새해 인사를 나눌 때 쓸 단어 두세 가지를 정해두는데, 올해는 이거다.

건강 그리고 다정.

올해의 나는 남편과 좀 더 다정하게 속도를 맞춰 걸을 거고, 건강하게 날들을 꾸릴 것이다. 차로 15분이면 바다가 있으니, 좀 더 수월하게 올해의 단어들을 실천해나갈 수 있겠지. 그게 우리의 하루가 되고, 한 달이 되고,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나와 남편의, 그리고 내가 아는 모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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