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쪽은 항상 나였다. 세상은 항상 나를 앞서가는 듯 보였고 나는 어쩐지 번번이 세상이 구축해 놓은 방식에 끼어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그 벽에 맨몸으로 부딪히는 것이 그 틀을 깨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뒤돌아보니 나는 늘 깨지기만 했지 한 번도 그 틀을 깬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번번이 숨이 차도록 움직이고 있었기에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만의 세상을 구축해 내 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숨을 고르며 돌아보니 쉬지 않는 것, 남들이 자는 시간에 깨어 뭔가를 하고 있는 것, 남들이 가지 않은 특이한 길을 택한 것 자체가 나를 특별하게 만들고 있었을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게 보인다. 그 깨우침 속에서 여전히 나의 맞은편에서 거대한 틀을 만든 채 따라와 보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세상을 본다.
벽을 보며 질문한다. 나는 왜 저 벽을 내 세상의 전부로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하고. 십 년 전과 다름없이 명분 없이 내 어깨를 내리치는 벽 앞에서 또다시 영문 모를 패배감을 느끼며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는 벽이 문이 되어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은 이제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세상의 환호를 받고 세상의 방식에 받아들여져서 모두가 따르는 그 길을 지향하고자 하는 노력은 여기까지면 충분하다. 할 만큼 했으니까 이제는 벽이 없는 나의 세상을 나의 방식으로 구축해가야 한다.
물론 세사의 방식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세사의 방식에 귀를 열어는 두되 나의 방식으로 나의 흔적을 남기고 그것을 나의 성과로 인정하는 연습을 해 나가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하건 세사가 어떻게 돌아가건 이제는 나의 페이스에 맞춰 내 업적을 조율해 나가야 한다.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보았으니 이제는 내가 나의 시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인내는 쓰기도 하고 달기도 했다. 목적 달성 여부와 관계없이 기다리는 것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때로 위안이 되어 주기도 했고 때로는 고문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쓰고 단 인내를 품으며 인내의 시간은 고통으로 그득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나의 맨눈을 마주 보는 것이 결국에는 나에게 약이 되어 남더라는 깨우침 하나는 얻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며 남은 유일한 그 깨우침이면 지난날들을 아쉬워할 일만은 아닐 테지만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은 이제는 사양하고 싶다.
하여 이제 막연한 기다림과의 결별을 선언하려 한다. 세상의 속도에 맞춰 나의 인생의 속도를 늦출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이고, 지금은 나를 비워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금 더 용기를 내 볼걸. 조금 더 무모해져 볼걸. 조금 더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해 볼걸, 하는 후회를 하는 것은 한 줄의 깨우침과 맞교환하기에는 내 가슴속 열정이 아직 너무 뜨겁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은 나의 페이스로 내가 보는 세상을 구축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 나에게도 소리가 있었음을 적어도 나에게만은 남겨둘 필요가 있기에.
Woman with a Fan_Maria Blanchard_1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