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를 넣는 유리공예품을 선물 받은 적이 있다. 제 몸을 녹여 빛을 내는 초를 보고 있자면 어쩐지 경건한 마음이 들어 마음이 무너지려 할 때면 자주 초를 켜 두고는 했다. 중세 유럽 성당의 유리창 같은 문형으로 장식된 그 공예품에 담긴 초를 보고 있으면 묘하게 몽롱해졌다. 녹아가는 초와 타오르는 불과 은은하게 퍼져 나가는 불빛이 어쩐지 하나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각각의 다름이 모여 하나로 부를 수 있는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무래도 신비롭게 느껴졌다. 그러면 이 다름을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이며 그 각각을 하나로 빚어내는 것은 또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예상 못한 상황이 불어닥쳐 눈물을 머금어야 하기도 하고 숨 돌릴만하다 싶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듯 들뜨게 되기도 하는 게 인생이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나의 적이 되고 누군가는 나의 편이 된다. 편이 되었다가도 상황에 내몰려 나에게서 등을 돌려서 버리기도 하고 손익을 계산하여 편인 척 다가와 어느 순간 내 뒤통수를 내려쳐 버리는 게 결정적인 상황에서 드러나 버리기 때문이다.
각자의 삶을 가까이에서 살펴보면 누구 하나 예외 없이 크고 작은 산과 험로와 예상 못한 파고를 마주해 가며 시간을 넘어서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여하간 필사적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는데 무엇이 누군가는 내게 해가 되는 사람으로 누군가는 그러지 않은 사람으로 분류하게 만드는 것인지 모르겠다 싶을 때가 있다. 그리하여 어긋나 버린 관계를 가만 들여다보고 있자면 소신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꽤 복잡하고 힘든 일이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예상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행동과 선택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긴 갈등을 들여다보며 한 가지 알게 된 게 있다. 아닌 것을 알면서도,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을 알면서도 상황에 휘둘리게 되는 근저에 욕망이 아닌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선택 가운데 욕망이 놓여 있었다면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뭔가를 욕망하게 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다며 수긍이라도 하겠지만 그 속에 불안이 깃들어 있다 싶으면 어쩐지 서글퍼진다.
욕망은 더함을 위한 것이니 누군가는 손해를 보게 되는 그 나쁜 선택을 나무라기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불안에는 그 선택이 치졸하고 비겁한 것이었음을 아는데도 차마 입을 뗄 수 없게 하는 구석이 있다. 나 또한 그 불안을 끝없이 마주해 나가고 있고 불안의 날들을 관통하는 것이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나였다면 불안을 일시에 소거하는 것으로 오히려 불안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리하여 소중한 것을 잃게 되는 선택이 아닌 천천히 불안을 타파해 가는 선택을 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상황이 그러하니 충분히 그러할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내가 소중히 하는 사람일수록 그 선택이 나와 같은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면 말끔했던 관계에 이 실금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일기 때문이다.
주고받고 빼앗고 뺏고 더하고 빼고. 저마다의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 씨실과 날실을 엮듯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시간을 함께 엮어 나가는 것이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일 것이다. 씨실과 날실이 기계적으로 맞물리듯 관계에도 절대 규칙이라는 게 있으면 좋으련만 사실 그러하지는 않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실이 꼬이기도 하고 때로는 풀려버리기도 하며 탄탄하게 쌓아 올렸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관계의 항아리에 금이 가게 해 버린다. 그 위에 다시 씨실을 올리고 날실을 올려가는 것으로 상처를 봉합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실금 하나 없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게 어쩐지 아쉬워 점점 마음의 문을 닫게 된다.
생각해 보니 밥을 담아 먹는 그릇은 미끈하게 떨어지는 백자가 아닌 투박한 질그릇이었다. 빚은 이의 손자국도 남아있고 깎고 깎이기를 반복한 흔적도 남아 있는 질그릇이 우리네 배를 불리게 하였다. 심미안에는 백자가 좋을지 모르겠으나 내 배를 불릴 밥을 담는 것은 질그릇이다. 인간은 배를 곯아서는 살 수 없다. 그렇게 보면 감정의 맞닿음에서 오는 부침, 감정의 꺾임과 깎임에서 오는 관계의 실금은 영혼의 양식일지도 모른다. 금이 가면 씨실과 날실을 금 위에 덧대며 항아리를 단단히 붙들어두면 되지 않을까. 어쩌면 그게 더불어 살아간다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