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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첫 짝사랑.

손 끝으로 여는 작은 세상

by 임그린

- 사진 최 원 철


그는, 대학생. 나는 꼬꼬마 중학생이었다. 계절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의 웃음이 강렬해서.


엄마 친구 아들. 진짜로 엄친아였던 그는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엄마와 엄마 친구분이 시간을 보내시는 사이, 멀뚱거리는 내가 맘에 걸렸는지 좀 걷자고 했다.

청바지가 그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을 그 때까지 본 적이 없어 설레던 참에. 에,에? 하며 얼떨결에 따라 나섰다.

동네 한바퀴를 돌며 빵집도 갔던 거 같고... 뭐라고 좋은 말도 많이 해 준 거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대학생 오빠 옆에서 걷고 있는 게 좋았지 않았나, 싶다. 난 그때 통통 살이 올라 터질 것 같은 모습으로 교복을 입고 있었으니.


잘 듣고, 잘 웃고, 엉뚱하게 순수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도 나와의 시간이 유쾌했으리라. 그 후로 우린 자주 보게 됐다.

그는, 나를 자주 불러냈다. 내가 오해를 했을 정도로. 시험 기간에 공부하는 그의 옆에서, 두터운 전공책에 끄적인 낙서 따위를 보며 혼자 키득대기도 했고. 대학 친구들 모임에 따라가서 그를 좋아한다고 티 내는 뽀얀 언니와 통하지도 않는 수다(?)를 떨기도 했다.


사실, 가끔 날 부르는 그 때문에 아, 진짜 내가 좋은가?

오해도 했다. 그래서 내가 잘하는 것. 귀엽고 앙증맞은 노트에, 색색깔로 낙서를 하고 그를 향한 마음의 편지를 쓰는 일 따위를 하기 시작했다.

기간이 얼마나 걸렸더라... 백일, 뭐 이렇게 특별한 일수를 따져서 주고 싶었지만. 급한 성격 어디가랴. 하루에도 몇 번씩 종이를 넘겨가며 휘갈겨 쓴 덕(?)에 생각했던 시간보다 더 일찍 준 듯도 하고.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었던)그는, 그 노트를 보면서 엉뚱하게도 디자인에 소질이 있다는 둥, 한 번 해보라는 둥... 하아, 내 맘을 보랬지 누가 그런 색감이나 센스를 보랬나고... 대학생이 왜 이렇게 눈치가 없냐며 속으로만 핀잔을 주기도 했다.


무슨 날, 가령 화이트데이 따위의 날에도 날 불러대는 통에 진짜 심각하게 오해를 했더랬다.

그러던 중, 그의 후배들 몇과 함께 그의 후배 집에 놀러 가게 됐다. 중딩 꼬맹이가 그런 만남에 무슨 재미가 있었겠냐마는. 그저 그를 한 번 더, 하루종일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으로 나름 예쁘게(?) 하고 나갔는데...

(진짜 재미없었다... 남자들은 뭉치면 정치얘기나 하고 여자들은 남자얘기나 하고...)

그랬는데, 앞서도 얘기한 뽀얀 언니가 그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바람에도 날아갈 듯 여려보였고. 함께 있으면서 웃는 그의 목소리도 호탕해서. 가슴이 쓰려 하루종일 무슨 말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애써 웃으며 재미있는 척, 했지만 그 시간들이 너무 괴로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와 같은 방향이던 그의 선배인지 후배인지에게 날 맡기고 그는 다른 길로 갔더랬다.

아, 접어야겠구나. 생각했다.

그의 선배인지 후배인지는, 여자친구와 7년을 사귀었는데 헤어지자마자 그녀가 다른 사람을 만났다며 울 것 같은 얼굴로 그 사랑 얘길 내게 했다. 얼마나 마음이 터질 것 같았으면 처음 본 꼬맹이 중학생에게까지 그런 얼굴을 보였을까, 이제와 토닥토닥 해주고 싶지만. 그땐 내 사랑이 더 쓰려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홀로 남은 내 머리로, 집 앞 누런 가로등 빛이 후두둑 떨어지자 울었던 것도 같다...


그렇게 처음 한 짝사랑은, 묻고 묻고 나도 어른이 됐다. 그때가 스물하고도 몇 살이었더라.


그와 우연히 통화를 할 일이 생겼다. 시간이 오래 흐른 뒤라서 장맛비처럼 쏟아붓던 내 사랑도 잠잠해지고 편하게 이런저런 얘길하게 됐다.


내가, 오빠 좋아했었는데. 그거 알았어요?


그는 전혀 몰랐다고. 아니, 밤새워 저딴 노트 따위도 주고, 한 번도 나오란 소리에 거절없이 달려나갔는데 몰랐다고? 속이 터졌지만 웃음이 났다.

웃자고 툭 던진 말에 바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

아, 탄식이...


나, 너 좋아했었어. 그 때.
근데 네가 너무 어려서... 어찌해야 할 지를 모르겠더라고...


잠깐, 그 시절 기억이 나서 설렜다. 시간이 살짝 멈춘 듯도 했다.

그 시절 우리가 서로 조금만 솔직했더라면. 가슴에 품던 그 애틋함을 조금만 보였더라면. 아쉽기도 했고.


그래도 참 좋은 기억.


사랑도 타이밍인가, 싶기도 하고.

두근두근, 순수하던 시절의 잊지 못할 기억.


아,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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