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최선은 결과보다 태도에서 드러난다
지난주 토요일, 사춘기인 큰아이와 마찰이 있었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던 아이는 역사 과목을 외우고 있었는데, 그 자세부터가 영 마뜩잖았다. 침대에 엎드려 교과서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한쪽 분량을 외우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다. 아이가 외웠다는 내용을 테스트해 보면 여지없이 틀리기 일쑤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조언을 건넸다. "그냥 눈으로 보기만 해서는 기억에 잘 안 남아. 써보기도 하고, 말로 설명하면서 외워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누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설명하듯이 외워봐. 네가 잘 외울 수 있는 방식을 하나 찾아보면 좋겠어."
아이에게 네다섯 번은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지만, 아이는 요지부동이었다. 여전히 침대에 엎드린 채 책만 뚫어지게 보면서, 마치 그 자세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길 바라는 듯했다. 결국 다시 테스트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외워오라고 했고, 그때 아이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저는 최선을 다했다고요! 최선을 다해도 안 외워지는 걸 어떡해요!"
아이의 목소리는 억울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순간, 나는 아이에게 분명히 짚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호하게 말했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하지 마. 엄마가 방법을 알려줬는데도 너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잖아. 네 방식만 고집했지. 바꾸려는 시도도 안 해놓고, 안 된다고 말하는 건 최선이 아니야."
아이의 얼굴엔 억울함과 분노,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아이는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 울더니, 마음을 정리한 듯 조용히 나왔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책상에 앉아 펜을 들고, 교과서 내용을 손으로 써가며 외우기 시작했다. 혼잣말처럼 내용을 말하기도 했고, 누군가에게 설명하듯 중얼거리며 외우기도 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단 30분 만에 6쪽 분량을 외웠고, 내가 테스트를 해보니 아까와는 완전히 달랐다. 단순히 암기만 한 게 아니라 내용을 이해하고 연결해서 설명할 수 있는 상태였다. 정확도는 높았고, 설명의 흐름도 좋았다. 나는 감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날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얼마나 가볍게 사용하는가. 누군가는 말한다. "내 기준에선 정말 열심히 했어요." 예를 들어, 평소 9시간씩 자던 학생이 시험기간에는 7시간만 자며 공부했다고 해보자. 그 학생 입장에선 최선을 다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하루에 4~5시간 자며 버텨내는 수험생들 앞에서는, 그것이 정말 최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최선이라는 말은 상대적이다. 사람마다 체력과 집중력이 다르고, 속도와 상황도 다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선의 기준이 완전히 개인의 감각에만 맡겨져도 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최선은 단순한 노력의 총량이 아니라, 상황을 직면하는 태도와 접근 방식까지 포함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내가 진심으로 좋은 결과를 원했다면,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방법을 바꾸려는 시도를 했는가? 주변의 조언을 수용하려고 마음을 열었는가? 뭔가 안 맞는 느낌이 들었을 때, 고집을 꺾고 다른 가능성을 실험해 보았는가?
만약,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자주 했다면, 사실은 아직 해보지 않은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감정적으로 지쳤다는 이유로, 혹은 내 방식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너무 쉽게 "난 최선을 다했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진짜 최선을 다한 사람은 그 말을 자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만큼 스스로 생각하는 '최선의 기준'이 높기 때문이다.
결국 '최선'이란, 결과와 상관없이 내가 시도할 수 있는 모든 방식과 태도를 점검해 본 후에야 꺼낼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말은 단지 자기 위로에 그치고 만다.
우리는 이제 묻고 답해야 한다. 정말로,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봤는가?
내 고집 말고, 더 나은 방법을 찾아보려는 유연함이 있었는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눈에도, 내가 한 노력이 '최선처럼 보였는가?'
이 질문들 앞에 정직하게 설 수 있을 때, 우리는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