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얽매는 집착 하나를 버리다.
한창 자료 관리에 빠져 있었다.
내가 본 책 표지와 장르, 저자, 판매 링크를 모조리 수집하고 입력하기를 즐겼었다.
꽤 많은 PKM툴들이 항목만 입력하면 예쁘게 표로 모아준다.
입력한 데이터는 출판사나 작가별로 모아서 볼 수 있는 등 꽤 만족감이 높았다.
그 재미에 책뿐만 아니라 갔던 식당의 별점, 위치, 가격,
내가 본 모든 영화의 표지와 배우, 내가 쓴 프로그램의 스샷과 공식 링크, 종류까지 모조리 정리했었다.
한 가지 툴을 쓸 때뿐만 아니라, 툴을 바꿔 쓸 때마다 같은 일을 반복했고,
반복을 줄이기 위해 데이터를 변환하는 툴도 만들어 쓸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는? 안 한다.
처음 만들 때는 재미있었다. 만들고 나면 뿌듯하기도 하다.
새로운 책을 입력할 때도 체계적인 다양한 정보를 입력하는 것이 꽤나 만족스럽다.
하지만, 그뿐이다. 이렇게 모은 것을 내가 유용하게 쓸 일은 사실 거의 없다.
물론 아예 없진 않다. 한두 번은 있겠지.
하지만, 이걸 구축하고 관리하는 시간을 생각한다면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필요해서 했기보다는 자기만족에 가까운 작업.
자기만족으로 끝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관리하는 것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관리할 요소는 내가 신경을 쓸수록 점점 늘어나기 마련이다.
내가 좋아하는 '이과형 두뇌 활용법'이라는 책이 있다.
흔한 자기 계발서 같은 제목과 달리, 원제는 A mind of Numbers라는 멋들어진 제목이다.
출판사의 과도한 의역(...)때문에 원 제목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원 제목을 관리 항목에 추가했다.
그 뒤로 그 뒤로 읽는 책들은 모두 원제를 적기 시작했다.
도움은 된다. 원래 제목을 함께 보면서 어떤 식으로 번역했는지 보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하지만, 그렇게 항목이 하나씩 늘어날수록 책 한 권에 적을 양이 늘어났다.
더 큰 문제는 이미 입력한 책들이다.
100여 권이 넘는 책들에 새로 추가된 항목을 다시 채워 넣어야 하는 압박이 밀려왔다.
처음에는 즐겁던 입력 작업이 점점 괴로워졌다.
책 메모를 만드는 것이 스트레스가 되었다.
이미 밀려있는 책들의 추가 항목을 입력하는 것도 나를 기다리고 있다.
입력을 하지 않자니, 텅 빈 항목들이 이빨 빠진 것처럼 보기가 싫다.
내가 다른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이, 책 관리에 점점 소모되었다.
채우는 게 노동이 되니, 처음엔 뿌듯하던 책장도 꼴 보기 싫어졌다.
만약 이 책 목록이 나에게 유용했다면, 이를 악물고 계속 진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만족 이외의 장점은 없었다.
그냥 점점 할 일만 늘어나자 결국 외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관리 방법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이제는 더 이상, 인터넷에서 검색으로 쉽게 찾을 수 있는 자료는 정리하지 않는다.
내가 깨달은 것, 나에게 유용한 정보만 남기려고 노력한다.
그럼으로써 관리 비용을 최소화하고 중요한 것만 관리할 수 있다.
옵시디언에서 보고 싶은 책 문서를 하나 만든다.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하면 책 이름과 저자, 왜 보고 싶은지 정도만 문서에 기록한다.
그리고 책을 사면 산 책은 취소선을 그어 표시한다.
대부분의 책,
특히 소설이나 한 번 읽고 말아도 되는 책들은 이걸로 관리를 끝낸다.
이전처럼 책 표지나, 출판사를 일일이 정리하지 않는다.
어차피 구글 검색 한 번에 다 나오니까.
책을 읽다가 꽤 괜찮은 책이라고 판단되면 책이름 by 저자 형태의 메모를 만든다.
읽으면서 특별히 기억해둘 개념이나 아이디어, 예시가 있으면 그때그때 메모를 만들고,
책 메모 근처에 배치한다. (제텔카스텐 방식)
이렇게 정리한 것들은 나중에 내 글을 쓸 때나 사고를 전개할 때 쏠쏠하게 도움이 된다.
원 영문 제목도 이제 따로 항목 같은 걸 만들어 기재하지 않는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책 중에, 원제를 알아야 할 경우만 메모 안에 기록한다.
지금 원제를 따로 기록한 책은 현재 A mind of Numbers(이과형 두뇌 활용법)와 The Effective Executive(지식경영노트) 정도이다.
몇 백 권의 원제를 입력해야 한다는 압박이 없어 마음이 훨씬 편하다.
별점 1점부터 5점까지, 메뉴와 위치까지 정리하는 건 이제 안 한다.
1점짜리를 내가 기록할 이유는 사실 없으니까.
정리하는 것은 딱 하나. '내가 좋아하는 가게의 휴일'이다.
몇 번 가게 앞까지 갔다가 '금일 휴일' 팻말을 맞닥뜨리고 나서부터 정리 시작.
특히 지방에 있는 음식점은 서울과 휴일 패턴(보통 수요일에 많이 쉰다)이 달라서 기록해두는 것이 낫다.
그 외의 정보, 내가 좋아하는 가게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을 때는,
그냥 인터넷에 적힌 리뷰를 검색해서 보여준다.
리뷰는 실시간으로 갱신되니 오히려 최신 정보를 알기 좋다.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내가 다시 정리할 이유는 딱히 없다.
자주 가는 지방의 숙소의 정보도 모조리 지웠다.
이제는 가는 숙소의 어메니티 종류만 남아있다.
짐 쌀 때 참고하는 것 만으로 짐을 줄일 수 있어 유용하기 때문이다.
숙소, 음식점 관련 사진은 구글 포토에서 여행 앨범으로 만들고 글 쓸 때 따로 참고한다.
어차피 사진은 찍는 대로 구글 포토에 올라가고,
여행이 끝나고 한 번에 모아 앨범으로 만들면 돼서 관리 비용도 거의 없다.
비행기 기종이나 시간 같은 거는 빼고, 앉았던 자리 중 마음에 든 자리를 정리한다.
내가 본 영화 리스트와 포스터도 더 이상 입력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영화나 배우는 대충 기억하고 있고, 별로인 영화는 굳이 기록할 필요가 없다.
단 하나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 인터스텔라 포스터와 문장.
We will find a way. We always have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너무 좋아하는 문장이고, PPT 등에 종종 사용되는 거라 보관중.
이제 나에게 남은 것들은 내가 유용하게 쓸 것이라고 명확하게 생각되는 것들만이다.
언젠가 필요하겠지라는 생각으로, 정리하기 위해 정리하는 관리 비용과 시간은 모두 사라졌다.
비유하자면 사서와 학자의 업무 중 사서의 업무를 포기한 셈이다.
예전처럼 멋진 나만의 도서관을 관리할 수 없지만, 대신 연구할 충분한 시간이 나에게 돌아왔다.
새장에 있는 새와 그 새를 관리하는 상인.
상인은 새를 세심히 씻기고, 먹이를 주며, 온도를 관리한다.
새를 보살피느라 정작 상인의 일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면
그 상인은 새의 주인이 아니라 새의 노예일 것이다.
정보 역시 마찬가지다.
정보는 우리가 사용하기 위한 도구이다..
하지만, 관리하는데 온 힘을 다 쏟아 정작 정보를 사용할 시간이 부족하다면
당신은 정보를 관리하는 주인이 아니라, 정보의 노예가 된 것이다.
피터 드러커는 '성과가 나지 않는 업무는 버리라' 고 조언한다.
당신은 어떠한가? 성과를 위해 정보를 관리하는가? 아니면 그저 정보의 노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