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bonne heure
연애할 때 미니에 대해 안 것 중 한 가지는 구두를 참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육수가 뚝뚝 떨어지던 여름날에도 슬리퍼나 샌들을 신은 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고, 눈이 펑펑 내리던 한겨울에도 운동화를 신은 그를 보지 못했다. 그에게 구두는 항상 옳았다. 데이트를 할 때면 늘 댄디한 옷차림에 매치되는 컬러의 깨끗한 구두를 신고 나왔다. 지금 기억나는 그의 신발이라면 갈색 구두, 연한 갈색 구두, 진한 갈색 구두, 검정 구두, 갈색 가죽부츠... 정도?
미니는 구두를 정말로 좋아했다.
그렇게 구두를 애지중지하는 사람은 내 평생 본 적이 없을 정도니까. 그의 구두 닦는 모습을 처음 본 날,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구두 덕후로구나!'
구두약을 발라 과하지 않게 광을 내고 보호크림을 정성스레 발라준 다음 마무리엔 수분으로부터 가죽을 보호하기 위한 스프레이를 촤~악 뿌려 직사광선을 피해 하루종일 건조시키는... 내 눈에는 정말 귀찮아 보이는 과정을 당연하다는 듯이 주기적으로, 것도 진심으로 기쁘게 행하고 있었다. 그러한 관리 덕분인지 그의 사랑을 듬뿍 받은 구두들은 항상 새 것처럼 빛이 났다.
연애할 땐 그랬더랬다.
내가 프랑스에 오고 나서 언제부터인가 사정은 좀 달라졌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파리지앵의 모습인가?' 생각하게 만들던 미니의 예전 패션 센스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고 구두는 오직 회사갈때만, 그 외의 외출은 대부분 운동화를 신기 시작했다. 한 운동화만 걸리면 너덜너덜 다 해질 때까지 신고 다녔고 여전히 그렇게 신고 다니는 중이다.
"미니, 요즘은 왜 패션에 신경을 안 써? 구두는 왜 안신어?"
"응. 물고기 잡으면 밥 안 줄 수 있냐구. 하하하!"
잡은 물고기에는 밥 안 준다는 말을 어디에서 배웠는지 이런 식으로 나를 놀리는 미니때문에 어이없어하다가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질 않았다. 그러기를 몇 번...
어느 날, 출근하려던 미니가 멈칫했다.
출퇴근용으로 매일 신던 검정구두 밑창이 떨어진거다. 앞코 부분 가죽이 다 해져서 영 볼품이 없던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제 빗물까지 샐 지경이 되었으니 이 구두도 떠나 보낼 때가 되었구나 싶었다.
"엥? 구두가 다 망가졌네?" 라고 말하던 미니에게 퇴근 후에 나가자고 하니 "나중에!"라며 귀찮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리곤 출근 길에 내다 버릴 쓰레기 봉지를 들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우리의 대화는 이랬다.
미니: "신발이 죽었네?"
유즈: "이번 주말에 사러가쟈."
미니: "귀찮아. 나중에! 챠오(ciao)!"
그 다음 날 아침, 또 그 다음 날 아침에도 같은 대화가 오갔다. 그렇게 두 세 달을 보낸 미니는 구두 따위는 아주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평일에는 피곤하다고 주말에는 놀고싶다고 쇼핑하러 나가기를 거부했다. 사실 미니는 옷이나 신발 보는 눈이 워낙 까다로운지라 내가 대신 사다줄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구두는 신어봐야만 하니까... 다 떨어진 구두를 신고 출근하는 건 안스러웠지만 피곤하고 귀찮다는 사람을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몇 가지 경험한 것들이 있는지라 남의 눈 신경안쓰는 그의 성격이겠거니하고 굳게 믿었다.
바로 이것들이 나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 준 아이들.
1. 작년 봄 한참 비가 많이 내리던 시기에 미니는 집에 있던 무려 세 개의 우산을 부러뜨렸다. 물론 바람의 탓이긴 했지만 스타워즈에 심취한 미니가 포스(force)를 느끼면 바람도 문제가 안된다며 우산을 광선검 삼아 놀다가 하나가 부러졌고, 두 번째 세 번째는 정말 바람에 확 뒤집혀서 우산 살이 다 망가졌다. 근데 그 부러진 우산 중 하나를 가방에 넣고 출퇴근을 하다가 큰 비를 한 번 경험하고선 도저히 안되겠는지 내 땡땡이레이스 우산을 들고 출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새 우산을 절대 사서는 안된다고 박박 우기는 그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은 다행히도 지난 달 프랑스 세일기간에 내가 사 준 우산이 그의 출퇴근 가방에 꽂혀있다.
2. 한 4년 전 즈음이던가? 10년 넘게 사용한 가방의 내부 천이 다 삭아서 물건을 넣으면 검은 가루들이 묻어 나왔다. 가방을 새로 사면 어떻겠냐고 하니 절대 안된다고 하길래 그 가방이 그렇게 좋으면 똑같은 디자인으로 사주겠다고 말하니 14살에 처음 뉴욕에 갈 때 맨 가방이라 추억이 가득해서 안된다고 했다. 출퇴근할 때 항상 사용하던 가방이었는데 앞 주머니 지퍼가 고장이 나서 닫을 수가 없었음에도 덜렁덜렁 입이 벌어진 그 가방만을 고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메인 지퍼마저 고장이 나서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고 그제서야 이 가방은 다락방 한 쪽으로 밀려났다.
3. 마지막은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 눈 앞에 자리하고 있는 미니의 필통.
초등학교 때부터 사용한 필통인데 아마 실물로 보면 누구나 놀라지 않고는 못베길 그런 비쥬얼을 자랑한다. 군데군데 구멍이 너덜너덜하고 낙서가 한 바닥이며 헝겊이 다 해져서 실오라기들이 파티를 벌이는 그런 형국이라 해야하나? 이건 말로 설명하기 참 어렵지만 남편은 아직도 잘 쓰고 있는 중이다. 이것 역시 추억이라며 자신에게 새로운 필통을 사 주는 것은 본인의 추억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했다.
한 집에 살게 되면서 새로이 알게 된 미니는 연애할 때 내가 알던 그 구두 덕후가 아니었다. 이 얼마나 검소한 내 남편의 모습이란 말인가? 까도까도 끝이 없는 이 매력쟁이 같으니라구!
얼마 전, 미니에게 드디어 새 구두를 사야만 할 이유가 생겼다. 지난 월요일부터 미니가 새로운 회사로 출근을 하게 되었기 때문인데, 다 떨어진 구두를 신고 첫 출근을 할 순 없지 않느냐고 설득해서 그 전 주 토요일 저녁 구두 쇼핑을 다녀왔다. 회사에 매일 신고 다닐 수 있는 검정 구두 한 켤레를 골랐고 미니는 꽤나 만족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서 보니 옆에 남편이 없다.
눈을 비비고 정신을 차리고서야 침실 한쪽 구석에서 등을 보인 채 꼼지락 거리고 있는 남편을 발견했다.
"미니?!" 하고 부르니 고개를 돌리고 빙구처럼 웃으면서 말한다.
너무 예뽀.
아침에 눈뜨기 무섭게 새로산 구두를 보고 있었던거다.
게다가 "뭐라고? 와이프가 내 구두가 보고 싶다고?", "와이프는 내가 구두를 신어보면 좋을거 같다고?" 라고 혼자 상황극을 하면서 구두를 신고 보여주기까지 했다. 얼마나 좋으면 저럴까 싶어서 격하게 잘 어울린다고 말해 주었는데 남편의 이런 상황극은 하루종일 계속되었다.
새로운 회사로의 출근을 앞 둔 일요일 저녁, 미니는 새 구두를 꺼내 신주단지 모시듯 방석 위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잠이 들었다.
결혼할 때 나는 말그대로 몸뚱이만 왔다. 미니는 고생해서 번 돈이라며 내 통장에 있던 돈은 손대지 못하게 했고 미니의 결혼 반지도 본인 돈으로 샀다. 다른 여자들은 주렁주렁 뭣도 많은데 내 손목은 허전한거 같다며 좋은 팔찌도 사주고 시계도 사줬다. 겨울이 되자 와이프는 예쁘고 따뜻해야 한다며 새 코트랑 부츠를 사러가자고 하루가 멀다하고 나를 꼬득인다. 옷장에 옷은 백수인 내 것이 훨씬 많고 정작 출근하는 미니의 외투는 보풀이 한 가득인데...
눈치 없는 나는 어쩜 오늘에서야 알았다.
'남편은 나를 위해 구두를 포기했구나.'
프랑스에 오면서 나는 무직자가 됐다. 백수가 되서 제일 슬픈 것 중에 하나는 내 남편에게 좋은 선물 하나 못해 주는 것. 언젠가 나에게도 남편에게 좋은 구두 한 켤레를 선물해 줄 날이 올까?
남편, 3년만 기다려.
내가 열심히 그림 그리고 돈 벌어서
예쁜 구두 사 줄께.
월요일 아침.
불행히도 그의 첫 출근길엔 비가 내렸다.
덕분에 미니는 또 다시 낡은 구두를 꺼내 신었지만 대신 회사에 가서 갈아신을 새 구두를 손에 들고 출근했다. 새로운 시작에 맞춰 장만한 그의 새 구두. 이번 구두는 내 남편을 어디까지 데려다 줄 수 있을까? 더 좋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그를 안내해 줄 것이라 생각하면서 남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돌아오는 월요일 아침엔 햇살이 눈부시기를...
그래야 남편이 새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설테니까.